레일로드
우리가 어린 시절 어머니 손에 이끌려 타지로 갈 때나 타 볼 수 있었던 기차는 ‘완행열차’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근하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비둘기호, 통일호 등도 여행 떠나기 전날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면서 밤잠을 설치게 했던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
2008-11-24
김미진
우리가 어린 시절 어머니 손에 이끌려 타지로 갈 때나 타 볼 수 있었던 기차는 ‘완행열차’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근하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비둘기호, 통일호 등도 여행 떠나기 전날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면서 밤잠을 설치게 했던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만큼 ‘기차’라는 단어 속에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윤미경의 [레일로드]는 이 같은 향수를 우리 머릿속에서 끄집어내어 작품을 보는 동안 잊혀졌던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게 만든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의 차장을 꿈꾸었던 하민은 비록 우주로 여행을 떠나는 기차는 아니지만 사람들을 안전하게 여행하는 임무를 지닌 철도 승무원이 되었다. 첫 근무처였던 느린 완행열차에서 벗어나 새로운 근무지로 이동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마치 여행을 떠나 기차에 오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듯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제각기 나름의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다. 눈을 뜨면 언제나 똑같은 하루가 지겨워 무작정 기차에 오른 여고생, 짝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기차표를 끊은 젊은이, 혹은 일과 사람에 지쳐 바람을 쐬러 여행에 오른 아가씨 등 저마다의 사연을 싣고 기차를 떠난다. [레일로드]는 전체적으로 ‘추억’을 안고 달리고 있다. 어린 시절의 꿈을 좇아 승무원이 된 하민도, 그 하민의 모습에 반해 자신 역시 기관사가 된 소영도 그리고 근무 중에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대를 이어 차장이 된 영지 역시 모두 자신만의 추억을 안고 기차에 몸을 싣는다. 거기에 주인공 하민을 둘러싸고 두 명의 여인 윤소영과 송영지의 마음이 드러남으로써 추억을 안고 달리는 승무원과 사람들의 이야기에 로맨스를 더해진다. 중학교 시절부터 내내 좋아했지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은 채 하민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소영과, 함께 근무하면서 차츰 인물됨을 알아가 결국 하만이 ‘좋은 사람’임을 알게 된 영지 두 사람은 모두 하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한편, 같은 근무지에 있는 김철수가 송영지를 좋아하게 됨으로써 작품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닌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어머니의 모습과 닮아 호감을 느꼈고 결국 애정으로 발전하게 된 철수의 마음을 영지가 받아줄 수 없음에 안타까움이 실리고, 마치 상행선과 하행선처럼 만나지 못하는 인물들의 감정들은 고스란히 독자에게로 전달된다. 이처럼 작품이 보여주는 애정관계는 삼류 드라마에서 흔히 등장하는 실타래처럼 엉킨 애증관계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감정에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아련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사무치는 마음까지 담아낸다. 때문에 작가 역시 “나쁜 사람은 없었지만 결국 누구 하나는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는 말로 교차되는 감정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하민과 송영지의 앞길을 소영과 철수가 담담히 축복해줌으로써 호감의 소통을 완결 짓는다. ‘기차’는 각각의 도착지를 가진 이들이 한시적으로 함께 하는 곳이기 때문에 작품을 통해 때로 지인들한테도 보여주기 힘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첫 사랑에 대한 고민을 처음 보는 할머니에게 들려주며 해답을 구하기도 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염증이 생겨 힘들다는 이야기도 차장 아저씨에게 마음 편히 들려줄 수 있는 곳이 ‘열차’라는 공간이다. 현실적인 대안이 제시되지 않더라도 누군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일상을 소중히 보듬게 된다. 따라서 기차는 사람들을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플랫폼에 내려 일상으로 돌아갈 때 사람들은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마치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이 출발하듯이 기차가 도착한 곳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기차는,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고 에너지를 채워주는 마력을 지녔고, [레일로드]는 그 같은 마력을 한편의 드라마로 완성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