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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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렌 (SIREN)

[싸이렌]은 [야후]의 작가 윤태호가 스토리를 담당하면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연씨별곡], [로망스] 등을 통해 재치 있는 입담과 기발한 소재로 독자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왔던 작가가 이번에는 그림은 젖혀두고 전적으로 스토리만 담당해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만 몰두했기...

2008-11-14 김미진
[싸이렌]은 [야후]의 작가 윤태호가 스토리를 담당하면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연씨별곡], [로망스] 등을 통해 재치 있는 입담과 기발한 소재로 독자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왔던 작가가 이번에는 그림은 젖혀두고 전적으로 스토리만 담당해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만 몰두했기에 작품에 대한 기대감은 배가 되기도 했다. 얌전하고 조용했던 학생이 폭력적이 되거나 싸움을 일삼는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주변에 똑같이 폭력적인 친구들이 있어서 같이 어울리거나 혹은 집안에 싸움을 일삼는 이가 있거나 그도 아니면 억눌려 있던 마음을 폭발하도록 하는 어떤 매개가 분명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이 같은 이유들로 인해 우리 청소년들은 소위 ‘비행’청소년이 된다. 그러나 [싸이렌]의 주인공 ‘임다로’는 좀 다르다. 아니, 많이 다르다. 그는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발생한 억압의 문제를 다른 이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수치로 묶어버린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다. 때문에 그는 불량배를 욕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단련시킨다. “자존심이 없어졌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는다.”고 되뇌면서 말이다. 때문에 [싸이렌]은 말하자면 폭력을 매개로 한 일종의 ‘성장만화’다. 어린 시절 외부로부터 물리적인 폭력을 당한 경험을 가진 주인공이 자신의 수치스러운 경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동일한 폭력을 행사한다. 단, 주인공의 폭력이 다른 싸움꾼들의 그것과 다른 점은 약자를 괴롭히거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주먹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해 사용한다는 점. 그래서 주인공 임다로는 결코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주먹을 사용하지 않는다. 임다로의 내부에서 응어리진 생각들은 바로 다음 단계에서 실천을 이끌어낸다. 자신보다 강한 이들,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무시로 싸움을 청한다. 자신을 단련시키는 것 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것을 채택했다. 마치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이 무술의 고수들을 찾아 상대했던 것처럼 그는 학교마다 존재하는 ‘짱’들을 상대로 싸움을 해 나간다. 두려움을 버리고 상대방과 마주하면서 그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 나를 넘었다!”라고. 그러나 정작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직 그 선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직 성장을 못 다한 것이다. 이처럼 타인과의 싸움, 자신만의 투쟁을 옆에서 조심스레 관찰하는 이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이주나’다. 무릇, 남성들의 싸움터에 여성은 언제나 그 싸움을 일으킨 원인이 되거나 혹은 싸움의 끝난 뒤 쟁취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싸이렌]에서의 이주나는 명확히 관찰자의 역할로 등장한다. 그녀를 쟁취하기 위해 임다로가 싸우는 것도 아니요, 그녀가 다로 곁에 있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기 위한 순애보가 아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과의 싸움을 진행해나가는 다로를 지켜볼 뿐이다. 이렇듯 애정이나 사심이 들어가지 않으니 다로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지극히 ‘객관적’이다. 다로에게 그녀가 했던 표현, 어느 누구도 “너처럼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지극히 무미건조하면서도 대단히 날카로운 관찰의 결과다. 애정보다 호기심이 발동하기 때문에 다로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은 다로가 만나는 상대방들을 하나씩 설명하고, 그가 왜 폭력을 사용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해 나간다. 아버지의 무능함과 비겁함으로 인해 자신을 버려야 했던 상민이도, 부모의 지나친 기대 때문에 자신이 가야할 길을 몰랐던 용태도 모두 어딘가 자신들이 가진 답답함을 풀어야 할 곳이 필요했다. 상민이 용태를 보고 “재능 있던 애가 갑자기 안 될 때는 그 그만한 이유가 있다”라고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주먹을 사용하게 된 나름의 이유를 가진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폭력을 사용하게 된 원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주먹을 휘두른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작품 역시 타인에게 피해가 가는 폭력은 제거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