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천하 (酒遊天下)
“위스키는 맛보다 잘 팔아야 되는 거야, 맛의 차이는 그게 그거라구, 대부분의 소비자는 모르고 넘어간단 말이야.” “작가의 색깔”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것이 마이너한 취향이든 대중적인 취향이든, 때론 너무 어둡든, 너무 가볍든 간에, ‘작품’이라는 ...
2008-09-04
유호연
“위스키는 맛보다 잘 팔아야 되는 거야, 맛의 차이는 그게 그거라구, 대부분의 소비자는 모르고 넘어간단 말이야.” “작가의 색깔”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것이 마이너한 취향이든 대중적인 취향이든, 때론 너무 어둡든, 너무 가볍든 간에, ‘작품’이라는 것은 그 작가의 ‘색깔’에 의해 자신만의 개성과 생명력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직업은 대중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직업이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끊임없는 ‘소통’에 대한 노력이 작가라는 직업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무엇을 전달할까’ 라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어떻게 전달할까’라는 방법론 역시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작가의 ‘색깔’이라고 불리는 의미는 대개가 ‘무엇을 어떻게 전달할까’를 나타내는 것이긴 하지만, 이 ‘어떻게’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만화가에게는 그림, 분위기, 설정, 연출법 등 일 것이고, 소설가에게는 ‘문체’이며, 극작가에게는 ‘대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색깔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예술가가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소재든지 간에 자신만의 분위기와 느낌으로 창작해내는 것, 그것이 작가의 ‘색깔’이다. “주신우, 진우상사 영업팀장, 내 공식 직함이다. 술과 함께 하기로 한 순간부터 내 인생에 비공식은 없었다, 술은 내 인생의 전부다!” 그러나 아주 가끔, 슬프게도 자신의 색깔을 작가 스스로가 버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물론 버리려고 마음먹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쩌다 보니 자신의 색깔을 스스로 망가뜨리게 되는 경우다. “야후”, “발칙한 인생”, “로망스”부터 최신작 “이끼”까지, 중견작가 윤태호는 말 그대로 한국 만화계의 튼실한 “중견(中堅)”이었다. ‘대박’이라고 부를만한 힛트작은 없었을지 모르나 그 특유의 색깔로 독자들에게 어필하며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던, 아주 단단하고 튼실한 작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 “주유천하”는 상당한 실망감을 주는 작품이 되어버렸다. 스포츠 조선이라는 상업지에 원작자인 이원호(‘강안 남자’의 소설가)의 글을 받아 ‘술’을 소재로 한 성인만화에 도전했으나 어쩐 일인지 윤태호만의 색깔이 나오질 않고 계속적인 추락만을 거듭했던 것이다. 스포츠 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을 매 회 삽입해야 하는 편집부의 압력이 작용했을 테지만, 윤태호는 “주유천하”에서 아주 안 좋은 타협을 한다. 매 회 등장하는 불필요한 섹스신이 전체적인 줄거리를 거슬린다. 또 하나, 결정적인 실수는 원작자의 능력이 각색자인 윤태호보다 너무 “떨어지는” 하위 레벨이라는 것이다. 그간 작품에 ‘질’의 문제는 있을지언정, ‘고저’의 문제는 없다고 생각해왔지만 야설이나 써대는 3류 원작자의 글을 그대로 수용하기엔 윤태호는 이미 한참 위의 레벨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각색자로서 윤태호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했었더라면 이 어설픈 원작도 아주 재미있는 만화로 재탄생 되었을 것인데, 윤태호는 종영하는 그날까지 그러지 않는다. 결국 “주유천하”는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