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 (전4권)
“부탁이 있습니다. 한마디만 해주시겠습니까?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 한국사회의 내면 깊숙한 병폐를 점점 망가져가는 한 젊은이의 모습을 통해 리얼하게 묘사했던 작품 “야후”, 이 작품의 의의는 윤태호라는 작가를 한국 만화계에 뚜렷하게 각인시킨 것에 있다. 매우...
2008-07-16
유호연
“부탁이 있습니다. 한마디만 해주시겠습니까?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 한국사회의 내면 깊숙한 병폐를 점점 망가져가는 한 젊은이의 모습을 통해 리얼하게 묘사했던 작품 “야후”, 이 작품의 의의는 윤태호라는 작가를 한국 만화계에 뚜렷하게 각인시킨 것에 있다. 매우 리얼하고 잔혹한, 사회성 짙은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SF장르라는 비현실적인 독특함을 가미했던 이 문제작은 4년의 연재기간, 단행본 20권의 대장정을 거쳐 주인공의 파멸이라는 매우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내면서 윤태호를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야후”를 끝낸 이후 윤태호는 스포츠신문 ‘굿데이’에 노인들의 생활상을 리얼하고도 코믹하게 다룬 “로망스”를 연재하면서 또 다시 문제적 작가로서 자리매김하는 새로운 시도를 펼친다. 기존의 만화산업계의 인식으로 볼 때 윤태호의 이런 도전은 매우 놀라운 행보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야후”로 소위 ‘메이저’의 총아가 될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잡지를 떠나 신문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며 만화의 주인공으로 가장 기피되는 대상 중 하나인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연재했다는 것은 일종의 암묵적인 관례를 과감히 깨부순 혁신적인 시도였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야후’의 연재 후반부에 ‘로망스’를 동시 연재했다는 것이다. 매일매일을 그려내야 하는 신문만화의 작업에 격주간 만화잡지 연재까지 동시에 진행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위 말하는 일일만화 작가도 아닌, 개인작업을 하는 작가가 이루어낸 엄청난 ‘작품 생산력’도 매우 놀랍지만,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SF와 코미디라는 매우 상이한 장르의 두 작품을 잘 양립시켰던 그의 재능은, 정말 주목해 볼만한 작가라 하겠다. “벌써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간 이….차가운 시선은 계속 될 것이다. 이 모든 건 지나는 과정에 불과할 것이다…빨리 지나길 바랄 뿐….” 윤태호의 장점은 매우 상이해 보이는 두 가지의 코드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접목시킴으로써 리얼함에 바탕을 둔 독특한 페이소스가 매 컷마다 우러난다는 것에 있다. 직접 겪었던 겪지 않았던 간에, 작가에게 경험은 최고의 요소이며 그 경험을 자신만의 정서와 기술로 표현해내는 것이 소위 말하는 ‘프로작가’라 한다면, 윤태호는 이미 그 부분에 있어서 자신만의 확실한 방식을 만들어 낸 사람이다. 그의 스승인 한국 만화계의 거목, 허영만도 그의 행보를 예의 주시하며 ‘지고 싶지 않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하는 걸 보면, 그의 범상치 않은 작가적 재능은 앞으로도 계속 발현될 기미가 보인다. “와 내를 잡아묵을라 카나…이래 보일지도 몰라…이런 작은 마을에선 타지 사람 섞이는 게 영 불편하거든, 마을 사람들 사귀는 거야 찬찬히 하믄 되고 일단 나랑 먼저 통하믄 돼, 이 마을에선 내가 시작과 끝이라꼬, 먼 말인지 알긋나?” 2년여의 침묵을 깨고 이번엔 온라인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윤태호의 신작 “이끼”가 출간되었다. 온라인 만화웹진 ‘만끽’에 연재되던 동명의 만화가 출간되어 ‘책’의 형태를 띠고 세상에 나온 것인데, 조금 아쉬운 점은 출판사의 제작기술이 작가의 재능과 노력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료만화웹진을 표방하고 나선 ‘만끽’에 연재된 이 작품은 그 엄청난 두께의 질감과 모니터에 적응된 표현력에 혀를 내두르면서 나로 하여금 유료결제를 하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2년여의 침묵 속에서 윤태호가 온라인으로 무대를 옮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도를 했는지 1화만 보더라도 한눈에 알 수 있는 ‘이끼’는, 지면이 아닌 모니터로 작품을 봐야 한다는 가장 큰 난제를 완벽하게 극복해냈다. 마치 고급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리얼하면서도 풍성한 배경 속에 배치된, 만화의 느낌을 잘 살린 세밀하고 날카로운 동선,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장르의 법칙에 잘 들어맞는 음울하고 어두운 색채, 개개인의 특징이 잘 살아있는 입체감 넘치고 현실감 있는 캐릭터,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탄탄한 스토리 등, 그 무엇 하나 현존하는 온라인 만화 중에서 비교대상이 없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다만 앞서 지적했듯, 가장 아쉬운 점은 책으로 출간된 형태가 모니터에서 보던 작품의 질감을 다 살려내지 못했다는 데에 있고, (이 부분은 작가가 노력할 부분이 아니지만) 만약 네이버나 다음 같은 거대 포털사이트의 만화코너에서 무료로 보여졌다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이것도 작가가 노력할 부분은 아니다.^^) 독자에의 접근성이 매체에 있어 조금만 용이했더라도 이 작품은 요새 유행하는 원소스 멀티유스의 핵심이 될만했던 작품이지만, 그 부분은 산업적인 고민이지 작가와 작품이 고민해야 될 부분은 아니다. 어찌됐든, 계속적인 ‘진화’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 윤태호의 이번 시도는 90%이상 성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본격 한국식 잔혹 스릴러”를 표방하며 아직 1권밖에 출간되지 않은 시점에서 조금은 성급한 판단일수도 있지만, 만약 책이 아니라 모니터로 이 작품을 접하게 된다면 누구나 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