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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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 프로그램 (SHORT PROGRAM)

“고등학교 때 한 번도 못 만난 이유, 생각해본 적 없냐?” ‘지나간 첫사랑의 아련함’같은 만화적 감수성의 최고봉, 아다치 미츠루의 단편집 “쇼트 프로그램”이 호화 양장본으로 출시되었다. 작가가 10여 년 동안 꾸준히 그려온, 여덟 편의 완성도 높은 단편들이 매회...

2008-06-03 유호연
“고등학교 때 한 번도 못 만난 이유, 생각해본 적 없냐?” ‘지나간 첫사랑의 아련함’같은 만화적 감수성의 최고봉, 아다치 미츠루의 단편집 “쇼트 프로그램”이 호화 양장본으로 출시되었다. 작가가 10여 년 동안 꾸준히 그려온, 여덟 편의 완성도 높은 단편들이 매회마다 컬러가 추가되고 제책도 아주 고급스러운 300페이지짜리 책으로 묶여져 있다. 사실 아주 예전에 동명의 타이틀로 3권짜리 단편집 시리즈가 한 번 출시된 적이 있었으나 그 당시 책의 품질을 볼 때 이번에 나온 애장판과는 비교하기 어색할 정도라 아다치 미츠루의 팬이라면 꼭 소장을 권하고 싶을 정도로 아주 잘 나왔다. “하루에 한 번 스쳐 지날 뿐인 데이트엔 돈이 안 드니까…” 나에게 있어 ‘아다치 미츠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사가 “내 첫사랑이 너보다 2년 늦었어”다. 친구이자 라이벌인 고교 야구 소년들의 아련하면서도 유쾌한 이야기를 그린 명작 “H2”에 나온 이 대사는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아 안타까운 슬픔을 전해주었다. 꽤 오래 전, 지나온 날 어딘가에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두고 온 것이 갑자기 생각난 느낌이랄까? 여기 소개하는 “쇼트 프로그램”은 이런 느낌의 ‘정수(精髓)’ 같은 단편들만 제대로 모아놓은 아다치의 보석 같은 작품집이다. “나도 많이 놀랐어, 우연히 창 밖을 봤더니 그런 장면이 눈에 띄잖아” 전부터 느낀 거지만, 이런 종류의 사랑이야기를 다루는 데 있어 아다치는 가히 천재적인 감각을 타고난 것 같다. 직접적이고 강렬한 느낌의 사랑이야기보다는 잔잔하게 여운이 남고 간접적으로 스치듯 지나가는 그런 느낌, 마치 어린 시절 너무 빨리 녹아버린 솜사탕을 아쉽게 바라보던 그리움이 감미롭게 배어 나오는 듯 하다. “국내 신기록을 노린다면 1m 96으로도 충분해, 그럼 나머지 1cm 는 뭘 위해서지?” 녹아버린 솜사탕 같은 이야기의 묘한 여운은 사실 엄청나게 중독성이 강하다. 한 번 잡으면 절대로 헤어나올 수 없는 무서운 중독성이 아다치의 단편들에는 숨어있다. 예전에 나온 단편집 “모험소년”도 그랬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데는 아무런 무리 없이, 적절한 코믹컷과 세련된 연출이 잘 어우러져 이야기를 순식간에 읽어나가게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아주 오랫동안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는 느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시작은 가볍고 중간은 재미있으며 끝은 무겁고 아련하게, 이것이 아다치의 방식인 듯 하다. 꼭 그의 팬들이 아니더라도 “쇼트 프로그램”은 독자들에게 이 봄에 어울리는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