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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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사 고요

“그 쪽에서 로닌(浪人: 무가시대에 섬길 영주를 잃은 무사)을 고용했다면 우리도 고용하면 돼, 그러면 함부로 나서지 못하겠지, 호위무사를 두자구…형식적으로라도.” 중국의 철학자 장자(莊子)의 ‘내편(內篇)’ 제 1장은 ‘소요유(逍遙遊)’편으로 장자의 삶의 자세이...

2008-04-04 유호연
“그 쪽에서 로닌(浪人: 무가시대에 섬길 영주를 잃은 무사)을 고용했다면 우리도 고용하면 돼, 그러면 함부로 나서지 못하겠지, 호위무사를 두자구…형식적으로라도.” 중국의 철학자 장자(莊子)의 ‘내편(內篇)’ 제 1장은 ‘소요유(逍遙遊)’편으로 장자의 삶의 자세이자 그의 철학의 요체가 담긴 핵심이다. ‘소요유(逍遙遊)’란 낱말 자체의 뜻은, 마음 내키는 대로 슬슬 거닐며 다닌다라는 의미이고, 그 이면에 담겨져 있는 뜻은 아무것에도 구속 받지 않고 이리저리 자유롭게 노닌다는 뜻인데 여유, 평화, 자유 등을 포괄적으로 함축한 아주 고급스러운 단어라 하겠다. 내적인 자유를 구가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것으로 총칭되는 이 사상은 예로부터 선인(仙人)들의 삶을 지칭하는 말로 쓰여지기도 했다. “오늘이란 날은 다시 오지 않아, 느긋하게 보내고 싶지 않나?” ‘일본 만화계의 화두(話頭)’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 등장한 작가 오노 나츠메는 ‘not simple’, ‘라 퀸타 카메라’ 등이 잇달아 한국에 출간되면서 그 잔잔한 중독성으로 독자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엔 ‘평안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 숨어있는 치명적인 진실’같은 느낌이 있다. 그런 그가 ‘라 퀸타 카메라’에서 보여주었던 따뜻함과 여유로움, ‘not simple’에서 보여주었던 가슴 찡한 사연이 합쳐진 또 하나의 문제작 ‘납치사 고요’를 이번에 한국의 만화 팬들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나는 구름처럼 홀연하게 살고 싶을 뿐이야, 남이 품은 뜻에 이러쿵저러쿵 끼여들 생각은 없어, 열심히 노력해 보게나.” ‘납치사 고요’의 무대는 막부시대 말기 에도다. 변화의 기운이 소용돌이 치며 사람들의 삶을 휘감아가는, 사시사철 풍경이 아름답고 고즈넉한 도시 에도에서 ‘납치’를 생업으로 삼는 특이한 사내 야이치와 일자리를 찾고 있는 사무라이 아키츠의 만남을 통해 삶의 이면 속에 숨겨져 있는 ‘어떤 뚜렷한 진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를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 야이치는 납치단 고요(五葉)를 이끌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남자다. 그는 여유를 사랑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목적 자체로 삼는 매우 특이한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으로 부잣집 아이들이나 비리 정치인들의 자식을 납치해 몸값을 뜯어내는 일종의 납치범이지만 평상시엔 유곽의 호위 일을 하며 매일매일 동료가 경영하는 술집에서 술 한잔 하며 경치를 즐기는 여유로운 남자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는 소재의 특이함과 맛깔스런 대사, 매력적인 구성법 이외에도 무언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독특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넘쳐흐른다. 그 분위기는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동경하고 싶은, 그 어떤 이상향(理想鄕)과 닮아있다. 새로운 느낌의 만화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