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장의 시대 - 風葬의 時代 (인비인 - 人非人)
“세기말의 조선, 잊혀진 역사의 시간 속으로… 신(神)과 인간의 거대한 전쟁이 시작된다!” 오랜만에 썩 괜찮은 한국만화를 만났다. 대원에서 발행하는 격주간지 영챔프에 연재되고 있는 가리 글/ 이성규 그림의 “풍장의 시대”다. 한국적인 설정, 뛰어난 그림, 탄탄한 ...
2007-12-17
석재정
“세기말의 조선, 잊혀진 역사의 시간 속으로… 신(神)과 인간의 거대한 전쟁이 시작된다!” 오랜만에 썩 괜찮은 한국만화를 만났다. 대원에서 발행하는 격주간지 영챔프에 연재되고 있는 가리 글/ 이성규 그림의 “풍장의 시대”다. 한국적인 설정, 뛰어난 그림, 탄탄한 스토리, 빼어난 시대고증 등 만화 애호가로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만화다. “1895년 1월, 조선 고종은 ‘홍범 14조’를 선포하며 갑오개혁을 강화한다. 청으로부터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역사적 결단이었으나, 기실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첫 단계였다. 이후, 청의 영향력이 약화된 조선은 구미 열강과 일제의 이권다툼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 청, 러시아 등, 제국주의의 노선을 걷기 시작한 열강들의 힘겨루기 속에서 나라의 주권이 흔들리며 온 세상이 혼란스럽던 조선시대 끝 무렵, 지방토호인 정진사댁 삼대독자 정목은 아버지와 함께 간 한양구경에서 돌아와 엄청난 고열에 시달리며 생명이 위중해진다. 사경을 해매던 와중, 한양에서 본 서양인 복장을 한 남자 하나가 말을 걸고 정도령을 이상한 세계로 이끌어간다. 그곳에는 정도령이 태어난 해, 월, 일, 시의 수호신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무릎 꿇고 사정한 끝에 정도령은 열병에서 깨어나 목숨을 건진다. 이후, 9년이 지나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해괴한 것들을 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니게 된 정도령은 동네 사람들이 ‘죽다 살아난 뒤 무당이 되었다’고 수근 거리는 존재로 변해있었다. “개화도 사람을 가리는구나…..” 소의 해(丑), 용의 월(辰), 양의 날(未), 범의 시(寅)에 태어난 정도령(정목)을 수호하는 수호신은 소, 용, 양, 호랑이이다. 정도령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악귀를 물리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일들을 미리 알아 맞추기도 하는데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은 이들이 정도령을 따르는 이유다. 현재는 조용히 우주 저편에서 봉인되어 있는 미륵불이 현신했을 때 그의 대기(大器)가 될 육체의 주인이 정도령이라는 것이 그 이유인데, ‘개화’라는 바람을 타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이 한반도를 침략하던 당시의 혼란스러운 시대와 맞물려 엄청난 운명을 지닌 정목의 삶은 평지풍파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당시의 시대를 잘 고증한 배경, 인물들의 말투, 복장, 일상사, 삶의 가치관 등이 빼어난 그림들로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다사다난했던 조선 말의 풍경에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판타지가 자연스럽게 녹아 응축되어있는 점 역시 칭찬할만하다. 무언가 억지로 ‘한국적인 것’을 만들려 하지 않고 토속신앙, 도깨비, 무당, 십이지신, 미륵불 등 우리와 익숙한 여러 가지 신화들을 만화의 소재로서 잘 배치했다는 것이 이 만화의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