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애장판
만화의 모든 장르에는 그 장르를 대표하는 대표작이 있다. 대표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평단의 지지와 흥행의 성공, 양쪽 모두를 만족시킨 경우가 대부분이며 꼭 흥행에 성공하진 않았더라도 어떤 장르의 시초가 된 작품도 그 명성과 권위를 존중하여 대표작이라 이름 붙이는 경우가...
2007-10-29
석재정
만화의 모든 장르에는 그 장르를 대표하는 대표작이 있다. 대표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평단의 지지와 흥행의 성공, 양쪽 모두를 만족시킨 경우가 대부분이며 꼭 흥행에 성공하진 않았더라도 어떤 장르의 시초가 된 작품도 그 명성과 권위를 존중하여 대표작이라 이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소개하는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는 만화 시장의 한쪽 구석에서 여성 독자들끼리만 비밀리에 공유하며 즐겼던 남성끼리의 동성애를 다룬 작품, 소위 말하는 야오이 장르를 양지의 시장으로 끌어올린 대표작이다. 기실 동성애물은 아직도 동인지 시장이나 마니아들만의 시장으로 존재하지만 여기에 소개하는 이 작품처럼 평단과 대중, 양쪽의 지지를 받으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정식 라이센스판으로 출간되는 작품도 있다.(물론 이 견해는 한국에서의 기준이다^^) 기존의 어둠의 경로나 동인지활동을 중심으로 유통되는 동성애물은 여성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성과 코드를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맞춰진 은밀한 상상력이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핵심 요소이다. 여성을 성적으로 상품화한 포르노물이 남성들만의 판타지라면 야오이물은 여성들만의 판타지인 것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 남성 독자든 여성 독자든 간에 상관없이 작품 자체가 갖고 있는 비극성과 탄탄한 스토리, 빼어난 설정과 연출력을 갖추고 독자들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며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는 동성애물이 있다. 이런 작품들은 더 이상 여성들만의 판타지로 머물지 않는다. 소재가 동성애일 뿐이지 그 작품이 독자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남녀의 구별이 필요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고 일상의 두꺼움 속에 숨겨져 있는 삶의 비밀 한 조각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기와 나”로 유명한 작가 마리모 라가와의 “뉴욕뉴욕”이나 요시나가 후미의 “서양골동양과자점”, 그리고 여기에 소개하는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가 그렇다. “어느 슬픈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한다.”라며 잔잔하고 담백한 나래이션으로 시작되는 이 비극적인 작품은 어머니의 재혼상대이자 자신의 새 아버지인 남자에게 자신의 의지를 무참히 짓밟혀가며 강간을 당하고 절망의 나락에 빠져가는 아름다운 소년 제르미의 이야기이다. 제르미를 절망에 빠뜨리며 잔인하게 망가뜨리는 새 아버지 그레그는 그 어떤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보적인 악역 캐릭터다. 그레그의 사회적으로 드러난 겉모습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영국의 귀족이지만 내면에 숨겨진 자신의 굴절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비열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엄청난 독점욕과 잔인 무도함을 지닌 악마적인 캐릭터다. 이 작품의 묘미는 순백의 천사 같은 소년 제르미가 잔인한 악마 그레그에게 서서히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리얼하고 애잔하게 그려내는데 있으며 작품을 끌고 가는 탁월한 서사적인 연출은 책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독자들을 이 잔인한 비극에 정신 없이 빠져들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