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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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애장판

한국 순정만화의 계보에서 화려한 시대를 열었던 강경옥, 신일숙, 황미나, 원수연, 김혜린 등 인기 작가들의 시대를 뒤이어 2세대라 할 수 있는 신선한 작가들이 등장한다. “호텔 아프리카”의 박희정, “오디션”의 천계영, “마니”의 유시진, “특명 10대에 하지 않으면 ...

2007-10-10 석재정
한국 순정만화의 계보에서 화려한 시대를 열었던 강경옥, 신일숙, 황미나, 원수연, 김혜린 등 인기 작가들의 시대를 뒤이어 2세대라 할 수 있는 신선한 작가들이 등장한다. “호텔 아프리카”의 박희정, “오디션”의 천계영, “마니”의 유시진, “특명 1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의 나예리 등 1990년대 중반을 전후로 순정만화 제 2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작가들이 잡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1세대의 작가들이 작품의 거대한 스케일, 기승전결이 확실한 서사 구조, 개인적인 것보다는 시대적인 것들에 집중해왔다면 2세대 작가들은 조금 더 개인적이고 조금 더 사소한 것들에 집중하는 작품색깔을 펼쳐보였다. 이들이 선배작가들과 다소 다른 작품색깔을 가지게 된 것은, 시대가 바뀌면서 독자층의 감성도 바뀌었고 그런 시장의 변화에 맞추어 편집부가 다른 시도를 했다기보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의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감수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사회문화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이 시기의 작가들이 갖고 있는 가장 강한 특징을 “미시적인 감성”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거시적인 것에서 미시적인 것으로의 전환”이라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조에 맞추어진 이 새로운 감성의 작가 군을 2세대 순정작가라 불러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어쨌든 2007년 현재, 한때는 신성처럼 등장했던 2세대 작가들도 어느덧 데뷔 10년차가 넘어가는 중견작가가 되었고 예전 같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는 못하지만, 아직도 순정잡지의 일각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으며 ‘잡지의 허리’로서 순정만화계의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 가고 있다. “....점점 동물은 말라갔습니다. 뼈와 가죽만 남은 채, 유령 같은 모습으로 동물은 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바싹 마른 다리가 꺾였고- 뜨거운 모래 위에 넘어진 동물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독수리들이 달려들어 그의 가죽과 내장을 먹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흰 뼈만이 깨끗하게 남았습니다. 흰 뼈는 뜨거운 태양 아래 조용히, 그저 조용히 누워 있었습니다. 바싹 말라 버릴 때까지 모든 물기를 빼앗아 가는 잔인한 햇볕도 이제 그에겐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고.... 어느 날, 뼈가 말했습니다. ‘나는 흰 표범이야! 달숲의 흰 표범,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종족이야!’ 그 소리는 마치 덜그럭거리는 것처럼 들렸지요.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 울림은 곧 멈추었고 사막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또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어느 날- 나지막이(달각달각, 이라고 해야겠죠) 뼈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래...알았어, 난 뼈구나. 예전에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그저, 뼈야, 그래.’ 더 이상 그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평온해졌습니다.” 여기에 소개하는 “온”은 “신명기” 연재 중단 이후 한참을 쉬었던 유시진이 시공사에서 야심차게 창간했던 순정 격월간지 “오후”에 발표했던 신작이다. “마니”, “신명기”, “쿨핫”, “클로저” 등에서 보여 온 유시진의 작품 색깔은 매우 독특했는데 “철학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한 인물들 간의 관계정립”을 골자로 하는 이야기 구조에 “도달하지 못하는 곳을 향한 강한 열망”같은 주제를 꾸준히 이야기해왔다. 이런 사전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깔고서 “온”을 읽고 있자니 휴식기간을 거치는 동안 유시진 만의 이 “색깔”이 더욱 강화된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더욱 어려워졌고, 더욱 잡착하고 있으며, 더욱 어두워졌다. 결정적으로 예전에는 철학적인 작품 색깔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던 잔잔한 이야기의 재미가 아예 없어져 버려서 더욱 안타깝다. 만화라기보다 굉장히 어려운 철학 서적이나 종교서적을 읽는 느낌인데 아마도 새롭게 시작했던 작품이 “오후”의 뜻하지 않은 폐간으로 또다시 중단되는 사태를 겪게 되어서 작가의 심적 고통이 매우 컸던 것 같다. 어쨌든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시공사에서 3권으로 완결된 이 작품은 유시진의 팬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고 만화계로서는 또 하나의 다양한 색깔을 추가함으로써 시장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