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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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바리

90년대에 시작해 결국 9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한국의 성인만화 잡지는 업계에는 큰 상처를 남겼을지 몰라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편견을 뛰어넘어 새롭고 깊이 있는 작품과 뛰어난 작가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

2007-10-08 석재정
90년대에 시작해 결국 9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한국의 성인만화 잡지는 업계에는 큰 상처를 남겼을지 몰라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편견을 뛰어넘어 새롭고 깊이 있는 작품과 뛰어난 작가들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알찬 시기였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으로 문학과 만화의 결합을 시도한 박흥용이나 “리허설”, “첫사랑이 실패하는 일곱 가지 이유” 등의 단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어른들의 고뇌를 깊이 있게 풀어낸 탁영호, “혼자 자는 남편”, “발칙한 인생” 등의 작품으로 성인들만의 재미를 알차고 유쾌하게 풀어낸 윤태호, “how to...”, “슬픈 나라 비통도시” 등의 작품으로 언더만화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강성수(현재는 ‘위대한 캣츠비’의 강도하로 개명), “누들누드”로 새로운 선과 기발한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며 만화계뿐만 아니라 문화 산업계 전체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양영순 등 현재의 한국만화계를 이끌어 가고 있는 작가들이 각자의 지면에서 재능의 씨앗을 마음껏 발아한 시기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도바리”는 긴 침묵의 시기를 깨고 아주 오랜만에 작품을 발표한 탁영호의 중편으로 군사독재시절, 그중에 특히 5.18 광주민중항쟁이 벌어졌던 시기를 무대로 운동권 학생으로 수배당해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한 남자가 세상의 부조리와 권력의 폭압에 자아가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낸 사회성 짙은 작품이다. 「 “도바리”란 1980년대 당시 시국사건으로 수배중인 사람들이 단속을 피해 도망치던 것을 가리켜 말하던 은어이다. 만화 “도바리”도 수배중인 운동권 학생이 주인공이고, 도바리 중에 겪었던 일들이 주요 사건으로 연결된다. 특히 거대한 국가 조직의 폭력 안에서 그 폭력에 길들여지거나, 스스로가 새로운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보여 주려했다. 그리고 신념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1980년 광주항쟁의 시민군들을 통해 우리들의 폭력에 대한 불감증을 역설해본다. 나는 만화 “도바리” 작업 내내 심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나를 괴롭혔다. 아마 만화 속 주인공의 풀지 못한 숙제들이 내 것 인양 고뇌 했던 것 같다.」 - 작가의 말 中에서 이 작품의 중심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시민군의 한 명으로 광주의 상황을 몸소 겪으며 결국은 자신의 생명까지 잃게 되는 주인공의 후배가 주인공에게 인편으로 전해준 “피 뭍은 일기장 속의 광주”, 또 하나는 도피 생활 중에 수많은 부조리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에 절망하며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주인공의 “도바리” 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절망적인 상황이 교차적으로 편집되며 읽는 이의 가슴을 무겁게 만든다. 작가가 작품의 중간쯤에 삽입한 “쇠뚝이 장사”의 돌산에 얽힌 전설은 작가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관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으로 읽는 이에게 느끼게 하는 바가 매우 크다.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에 남았던 부분은 작품의 말미에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냈던 동지들과 나이를 먹어 재회하는 장면으로 커더란 시대적 아픔을 겪고도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 현재의 한국 정치 상황과 사회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것 같아 더더욱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