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파란 세이버
“사과안의 씨는 셀 수 있어도 씨 안의 사과는 셀 수 없다.” 한국 작가주의 만화가의 계보를 잇고 있는 작가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자신의 색깔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면 박흥용과 탁영호 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성인만화잡지가 살아남았다면 지금과는 아주...
2007-10-01
석재정
“사과안의 씨는 셀 수 있어도 씨 안의 사과는 셀 수 없다.” 한국 작가주의 만화가의 계보를 잇고 있는 작가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자신의 색깔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면 박흥용과 탁영호 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성인만화잡지가 살아남았다면 지금과는 아주 다른 평가와 대우를 받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작가들인데, 세간의 평가를 일단 뒤로 하고 그저 이들의 작품에만 주목해본다면 ‘문학적 감수성’의 박흥용과 ‘강한 사회의식’의 탁영호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박흥용의 “내 파란 세이버”가 바다그림판에서 한국만화대표선의 타이틀을 달고 새로이 다섯 권으로 묶여 나왔다는 것은 만화애호가로서 너무도 반가운 일이다. “생명의 무게는 생명의 채무자만이 알 수 있다.” 1970년의 충북 영동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잔잔하게 시작하는 “내 파란 세이버”는 어릴 적부터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던, 일명 ‘쌕쌕이’ 최대한이라는 소년이 자전거 선수로서 성장해 가는 이야기로 단순한 성장만화라 부르기엔 작품이 담고 있는 깊이와 색깔이 매우 깊고 다채롭다. 간간히 신문기사의 사진처럼 삽입되어있는 그 시대의 정치적 사건이라든가, 대한이가 어릴 적 ‘용공사범’으로 잡혀 끌려가 타계한 아버지에 관한 에피소드라든지, 이름도 끝내 알 수 없는 세상사에 달관한 거지나 만리장성의 주방장인 화교 손화명(슨허민)의 철학적인 대사들은, 이 작품을 재능을 갖춘 소년이 스포츠를 통해 성장해가는 단순한 성장드라마에 머물지 않고 세계와 인간에 관한 입체적이고 다각적인 고찰이 가미된 작품으로 승화시켜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가 “매우 재미있다”는 것이다. “왜 웃느냐, 이름만 바꾸면 너의 얘기인 것을” 작가의 전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시집을 만화로 바꾼 느낌의 작품이라면 “내 파란 세이버”는 소설을 만화로 바꾼 느낌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전작에서 보여준 “문학과 만화의 결합 가능성”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에 담겨진 선문답을 보는 것처럼 한 컷 한 컷을 연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성공시킨데 반해 “내 파란 세이버”에서는 “재미와 감동, 그리고 감수성”을 하나로 잘 버무린 맛있는 전주비빔밥이 완성되어가는 느낌으로 작품을 연출함으로서 성공시켰다. 처음 만화를 접해보는 독자라도 “내 파란 세이버”를 잡는 순간, 행복하고 진지하며 재미있는 시간으로 바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난 확신한다. “생명을 대신할 것은 생명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면은 매일매일 대한이네 중국집 “만리장성”에서 자장면을 얻어먹던 동네 공동묘지에서 사는 거지가 수해로 쓸려나간 다리 앞에서 가속도가 붙은 대한의 자전거를 자신의 몸으로 막아주고 대신 죽는 장면이었다. 이 사고 이후 대한은 극심한 성장통을 겪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 “생명”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 매우 담담하게 펼쳐지는데도 유난히 도드라지는 느낌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