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순정만화의 중견 - 라비헴 폴리스

라비헴폴리스를 단지 사랑을 모르는 하이아 (하이아 리안)와 하이아를 사랑하게 된 라인 (라인 킬트)의 러브스토리라고 하기엔 말이 많은 작품이다. 강경옥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궁극적으로 러브스토리가 아닌 것도 아니지만, 그것만이라고 하기엔 뭔가 많이 허술하다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작가의 사람과 사랑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초기작인 라비헴폴리스 역시 그런 작가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01-03-01 노수경

라비헴폴리스를 단지 사랑을 모르는 하이아 (하이아 리안)와 하이아를 사랑하게 된 라인 (라인 킬트)의 러브스토리라고 하기엔 말이 많은 작품이다. 강경옥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궁극적으로 러브스토리가 아닌 것도 아니지만, 그것만이라고 하기엔 뭔가 많이 허술하다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작가의 사람과 사랑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초기작인 라비헴폴리스 역시 그런 작가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강경옥의 작품들은 잔인하리만치 심리묘사에 능숙하다. 그것이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친절하게 독자에게 알려주는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길지 않은 등장인물의 대화와 독백은(결코 짧은 편은 아니지만) 캐릭터들의 마음이 독자의 가슴속을 헤집어 놓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것은 순정만화가로서의 작가의 치명적일지도 모를 인형같이 예쁜 캐릭터를 쓰지 않는다라는 핸디캡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강경옥 작품의 특징은 순정만화의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주로 아름다운 캐릭터와 환상적인 사랑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순정만화를 폄하해 왔던 남성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게 했다. 예쁜 캐릭터가 아니라 치밀한 구성과 사려 깊고 절제된 깔끔한 대사로 무장된 일상의 포착과 그것의 해부는 순정만화의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캐릭터인 공주/왈가닥의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강경옥 만화의 캐릭터들은 바로 지금 우리와 같이 숨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이다.

마치 SF물처럼 보이는 라비헴폴리스 역시, 2025년이라는 미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가까이에 있는 친구와, 내가 얽힌듯한 착각을 가져오게 한다. 그녀가 보편적인 감정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보편적인 감정들은 연애라는 형식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끌리는 두 사람 - 하이아와 라인-이 기존의 관계를 버리고 연인이라는 관계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온갖 잡다한 감정들과 사건들이 그들 주위에서 떠돌지만, 그것은 그들의 연애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상대방을 이해하게 하는 장치로서 작동한다. 이 장치들은 어설픈 감정으로 설익은 연애감정을 갖게 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하이아와 리안은 이 장치들 - 그들 주위에 관련된 사람들이 갖는 감정일 수 도 있고 그들이 맡게 된 사건일 수도 있다 -를 통해 자신과 상대방을 좀 더 이해하게 되고 익숙해지고,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언제나 조금은 우울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그려지는 그들에게 사랑이나 연애는 자기 자신의 바깥으로 나오는 첫번째 발자국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첫 발을 내딛기 위해 조금씩 배운다, 그게 어떤 감정이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법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악의적인 행동을 이해하는 것,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는 행위를 이해하는 것,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것 그것들은 자신을 진정한 사랑으로 이끌어 줄 뿐 아니라, 자신의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게 한다. 그 사람들과 동시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한다.

한편으로, 미래의 중립적인 도시국가 제한되고 안전한 공간인 라비헴폴리스에서 일어나는 경찰들의 러브스토리는 권력 관계나 역사적인 주변 상황이 인물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최대한 배제시키고 있어서 꽉 짜여진 구성에도 불구하고 실은, 덜 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춘기의 소녀들을 위한 강경옥 연출의 사이코드라마의 미덕이다. 사이코드라마란, 원래 도움이 안 되는 많은 부분이 배제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