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백의 신부 (하백의 新婦)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성작가의 판타지는 남성작가의 판타지보다 훨씬 아름답고 깊이가 있는 것 같다. 환상의 시공간에서 아름답고 슬픈 사랑이야기가 펼쳐지고 수많은 사연들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들이 커다란 흐름을 따라 얽혀가는 이야기를 읽어 가다보면 작가가 만들어낸 무한한 서...
2007-05-21
장헌길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성작가의 판타지는 남성작가의 판타지보다 훨씬 아름답고 깊이가 있는 것 같다. 환상의 시공간에서 아름답고 슬픈 사랑이야기가 펼쳐지고 수많은 사연들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들이 커다란 흐름을 따라 얽혀가는 이야기를 읽어 가다보면 작가가 만들어낸 무한한 서사의 바다에 빠져있는 자신을 어느새 발견하게 된다. 여성 특유의 감수성으로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설정과 개성을 부여하는 순정작가들의 판타지는 남자 주인공의 무공과 전적을 향상시키는데 온 힘을 쓰는 남성작가들의 무협 판타지에서 경험할 수 없는 깊이를 느끼게 하는 것 같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외할아버지로 알려진 수신(水神) 하백, 신화 속에서는 해모수와 정을 통해 주몽을 임신한 자기 딸을 내쫓은 조연 정도의 존재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등장하여 작품의 중심에 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특히 낮에는 귀여운 꼬마의 모습으로 있다가 밤이 되면 아름다운 육체와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지닌 남자로 변하는 하백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 막힐 정도의 아우라를 내뿜는다. 스토리의 고풍스러운 진지함도 예전 강경옥, 황미나, 신일숙, 김혜린 등 최고의 작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의 순정만화의 황금기를 떠올리게 한다. 아직 3권까지밖에 나오질 않아서 하백의 첫 신부 낙빈과 하백 간에 얽힌 사연이나 서왕모와 하백간의 애증의 모자관계, 천제와 하백사이의 옛일들, 후예와 하백간의 사연 등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남아있지만 하백의 신부인 여주인공 소아와 낮에는 꼬마 하백, 밤에는 아름다운 청년 무이로 변하는 남자 주인공 하백의 사랑 이야기만으로도 이 만화의 재미를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꼬마와 청년의 모습을 오가며 1인 2역을 훌륭하게 소화하는 주인공 하백의 설정에 있다. 낮에는 차갑고 퉁명스러운 꼬마지만 밤에는 아름답고 사연 있는 남자로 변하는 주인공이라니, 더 이상의 덧붙임이 필요 없을 정도로 판타지 만화의 주인공으로서 훌륭하다. 거기다가 ‘마스카’(김영희 作, 서울문화사)의 마왕 캐릭터에 뒤지지 않는 카리스마도 있고,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애잔함도 있으며, 달빛아래서 술 한 잔 기울이며 비행선을 몰아 은하수의 한복판으로 여자를 데려가는 로맨틱함도 갖추고 있다. 하백과 소아 주변의 등장인물들도 매우 훌륭하다. 불의 신이지만 항상 물의 나라에서 지내는 괴팍하고 정감 가는 캐릭터 주동, 누구보다도 하백의 신부가 되고 싶었지만 영원히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운명의 여신 ‘무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 아이 무산신녀 요희, 발명가이자 의사인 태을진인, 하백의 어머니이자 형벌과 고문의 여신 서왕모,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백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과 천계 제일의 신궁(神弓)이라 불리는 무예 실력을 갖춘 대장군 후예, 등 읽는 이를 즐겁게 할 단단한 조연들이 작품의 깊이와 두께를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매력적인 조연들이 각자의 사연과 개성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끌어내는 작가의 연출법에 의해 작품의 서사구조를 만들어가고 있어 한 번 책을 잡으면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든다. 몇 년째 비가 오지 않아 마을 사람들에 의해 ‘하백의 신부’로 간택되어 제물로 바쳐진 소아와 신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는 남자 하백, 봄바람이 싱그러운 요즘, 사랑을 기다리는 여자들이 재미있고 즐겁게 읽기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