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처녀
권교정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알게 된 것은 지인의 소개로 읽게 된 ‘헬무트’였다. 그간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순정만화라는 지인의 칭찬에 별 생각 없이 책을 집어 들었다. 순정만화에 별 지식도, 흥미도 없던 나로서는 지인이 얘기하는 ‘그간 볼 수 없던 신선함’이 무엇인지 ...
2007-04-30
장헌길
권교정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알게 된 것은 지인의 소개로 읽게 된 ‘헬무트’였다. 그간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순정만화라는 지인의 칭찬에 별 생각 없이 책을 집어 들었다. 순정만화에 별 지식도, 흥미도 없던 나로서는 지인이 얘기하는 ‘그간 볼 수 없던 신선함’이 무엇인지 잘 느낄 수 없었지만 매우 독특한 서사 구조와 무언가 묘한 감수성이 느껴지긴 했다. 이번에 새로이 나온 권교정의 신작 ‘왕과 처녀’는 무언가 완결된 형식의 정통파 단행본이라기 보단 무언가 아주 긴 이야기의 에필로그 같은 느낌이 강했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나 열려있는 결말이 신기해서 작가의 후기를 읽어보았더니 작가가 구상하고 있는 광대한 판타지 세계를 무대로 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는 작가의 멘트가 들어있었다. ‘이미 본 자’가 예언한 바와 같이- 어둠이고 어둠이며 어둠인 것이 뷸트란의 정상에서 드래곤의 모습으로 자라나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라라미드의 시골 청년인 데트가 4명의 동료와 힘을 모아 어둠의 화신 ‘노이긴’을 물리쳤다. 그리고 잿더미로 변한 땅에 나라를 세우고 유테일렌을 건국하여 초대국왕이 되었다. 지혜와 지식으로 일행을 조율했던 포어는 국왕 데트와 결혼했고 용맹과 신의의 기사 오센은 유테일렌의 대장군 자리에 올랐고 치료와 안식의 체칠은 템포로 돌아가 대치유사가 되었으며 마법사 데어고어는 다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여전히 평화로웠다. 가디나의 떠돌이 행상 헨지는 어릴 적부터 동경하던 이야기속의 주인공이 자신이 장사하고 있는 이 땅의 국왕이라는 것이 너무나 신기해서 주위의 동료들에게 국왕의 진짜 모습에 대해 계속해서 묻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만화나 소설, 영화 등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의 취향은 그 결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해피앤드든 언해피앤드든 간에 결말이 확실하게 닫히는 걸 좋아하는 독자와 무언가 미묘한 여운이 남는 열린 결말을 선호하는 독자들로 나뉘는 것 같다. 현실에서야 당연히 열린 결말이 압도적으로 많겠지만 그런 애매모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허구의 이야기를 찾는 것이 독자들의 마음이므로 어느 쪽이 더 좋은 취향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열린 결말을 재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가 흔치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권교정의 작품은 대체로 묘한 여운을 주는 열린 결말의 구조가 많으며 세세한 디테일부터 등장인물의 대사 한마디까지 결말의 완성도를 높인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베스트셀러라 불리 우는 작품들은 닫힌 결말로 마감되는 것이 많다. 그러나 스테디셀러라 불리 우는 작품들은 열린 결말로 끝맺으며 묘한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들이 많은데 권교정이라는 작가도 후자의 재능을 소유한 작가인 것 같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작가의 건강상태가 문제인 건지, 지구력의 문제인건지, 아니면 한국 만화계의 현실 때문인지는 몰라도 재대로 끝맺은 작품들이 얼마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아무리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고 해도 작품으로 완결되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매니악하고 마이너한 정서가 싫다는 것이 아니라, 권교정이라는 작가의 독특한 감수성과 여운이 남는 결말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완결된 작품을 선사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