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순정만화의 중견 - 레드문

만화가 황미나는 정통 순정만화의 길을 열어놓은 선구자로서 역사물, 무협물, 환타지 등의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창작해왔으며 코믹액션물을 그리면서 편안한 작풍으로 소년독자까지 확보한 대중적인 작가로 거듭났다. 이러한 중견만화가 황미나에게서 태어난 레드문은 SF환타지물로 5년에 걸쳐 18권 분량으로 완결된 대작이다. 이 작품은 큰 인기를 끌어 모방송국에서 라디오극장으로 방영되는가 하면 동명의 게임으로 만들어지는 등 다양한 파장을 일으켰다. 남녀 모두에게

2001-03-01 최현정

만화가 황미나는 정통 순정만화의 길을 열어놓은 선구자로서 역사물, 무협물, 환타지 등의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창작해왔으며 코믹액션물을 그리면서 편안한 작풍으로 소년독자까지 확보한 대중적인 작가로 거듭났다. 이러한 중견만화가 황미나에게서 태어난 레드문은 SF환타지물로 5년에 걸쳐 18권 분량으로 완결된 대작이다. 이 작품은 큰 인기를 끌어 모방송국에서 라디오극장으로 방영되는가 하면 동명의 게임으로 만들어지는 등 다양한 파장을 일으켰다. 남녀 모두에게 보편적인 환타지물로 어필되어 1999년 문화관광부가 뽑은 [오늘의 우리만화]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사실 SF환타지물로서 ‘레드문’은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기보다는 낯익은 코드를 재구성해 보여준다. ‘레드문’은 독창적인 발상이나 정교한 메카닉을 중요시하는 독자라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는 SF물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과 예언, 초능력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외계의 공간은 이색적인 장치일 뿐 이 작품의 개성은 비극적인 갈등구조, 절절한 인간관계를 축으로 전개되는 드라마에 있다.

시그너스 별의 구원자로 예언된 ‘태양’ 필라르는 지구의 평범한 고등학생 윤태영의 육체 속에 봉인되어 있다가 그를 죽이러 온 아즐라 일행에 의해 각성하게 된다. 아즐라는 실은 필라르의 동생으로서 어렸을 때 아길라스에게 납치되어 그에게 조종당하는 현재의 태양이다. 아길라스에게 세뇌 당해 필라르를 죽이려 하는 아즐라와 그를 구원하고자 하는 필라르. ‘레드문’은 형제의 엇갈린 운명이라는 비극에서 출발한다. 타고난 태양 필라르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 뿌리깊은 고아의식 때문에 아즐라는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가진 미성숙한 인물로 그려지며 아길라스의 프로그램에 의해 폭주하여 살인귀가 되는 고통을 겪는다. 고향으로 돌아온 필라르 또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연인과 어머니, 불신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상처 받으며 아길라스에게 유린된 삶을 사는 빈민들과 반군(反軍)을 묵묵히 돕는다. 지상생활의 비참함을 체험하고 제제라는 아이와 순수한 교감을 나누면서 아즐라는 진정한 태양의 모습에 다가선다. 결정적으로 아즐라를 살리기 위해 필라르가 해주었던 수혈이 기폭제가 되어 태양의 능력이 아즐라에게 전이된다. ‘하늘은 아즐라를 선택했다’. ‘타고난’ 태양인 필라르는 ‘나누어 주는 존재’ -승리를 쟁취하는 영웅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는 구원자으로서 빛을 발하게 된다. 이러한 반전 속에서 고통과 고행으로 정화되고 성숙한 두 형제는 극적으로 화해하고 육체를 버리고 기계에 의존하여 영생을 꾀하고 탐욕스럽게 시그너스를 유린해온 반(反)생명, 진정한 적 아길라스를 폭파시킨다. 갑작스런 폭발로 관리시스템이 중단되어 시그너스 전체가 멸망할 위기에 놓이자 필라르는 자신의 피로 행성을 소생시킨다. 생명은 나눔으로서 거듭 살아나는 것. 자신을 버림으로써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강렬한 화면으로 형상화 된다. 아길라스 또한 이루지 못한 사랑과 빗나간 야망의 희생자라는 점을 암시하여 작가는 불완전한 인간을 감싸안는 일관된 휴머니즘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레드문’에는 눈물씬과 고통으로 포효(!)하는 씬, 포옹씬과 키스씬이 자주 등장한다. 과잉된 감정이 원초적으로 그려지는 감이 있다. 그러나 대중은 감정의 격랑을 타길 기대하며 논리적이거나 설득력이 약해도 감동 받기를 바란다. 필라르의 희생장면은 온갖 감정- 증오와 질투, 배신과 고독, 집착과 소유욕을 사랑으로 초월하는 감동을 선사한다. 자칫하면 신파로 흐를 수 있는 격렬한 감정표현이 비극적인 갈등 구조 속에서 설득력을 지니며 감동을 고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필라르와 사다드의 강력한 유대관계 또한 독자에게 어필하여 사다드의 인기를 드높였다. 사다드는 생명까지 주저 없이 바칠 정도로 필라르에게 헌신한다. 사다드에게 필라르는 유일무이의 태양이자, 생명이자 영원이다. 필라르 역시 어머니 이상으로 필라르를 믿고 의지한다. 의심 많고 고독한 현대인들에게 이들의 관계는 행복하며 부러운 관계로 비춰진 듯하다. 이들의 신뢰관계는 때론 미묘한 동성애적인 냄새를 풍기는데 작가가 직접 ‘레드문’을 소년물로 패러디하여 장르에 따라 정서적 울림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유머러스하게 보여주었다.

레드문‘은 이색적인 외계공간에서 웅대한 스케일로 휴머니즘을 역설하며 탄탄한 구성력과 반전(反轉), 극적인 연출로 독자에게 고양된 감정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하여 황미나의 대표작 으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