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한국 만화계의 거두, 허영만의 작품세계는 한 마디로 “다양함”이라 말할 수 있다. 코미디, 사회, 역사, 스포츠, 액션, 기업, SF, 요리에 이르기까지 과연 이 작가가 만화로 손을 대지 않은 장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작품 세계는 엄청나게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
2006-12-30
장헌길
한국 만화계의 거두, 허영만의 작품세계는 한 마디로 “다양함”이라 말할 수 있다. 코미디, 사회, 역사, 스포츠, 액션, 기업, SF, 요리에 이르기까지 과연 이 작가가 만화로 손을 대지 않은 장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작품 세계는 엄청나게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물론 30년이 훌쩍 넘어버린 작가의 관록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이 정도의 경력과 세월을 지낸 작가들 중에서도 허영만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작가는 없다. 누구에게나 특기라 부를 수 있는 장르가 있을 법도 한데 손대는 장르마다 완벽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허영만은 딱히 특기라 부를만한 장르가 없어 ‘만능형’ 작가라 부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허영만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무당거미”, “미스터 Q”, “오! 한강”, “벽”, “비트” 등을 꼽을 것 같은데 물론 이것 말고도 허영만의 대표작은 워낙 많지만 여기에 소개하는 “벽”은 작품이 담고 있는 짙은 사회성과 주인공의 독특한 개성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잊혀 지지 않는 작품이다. “담배 한 개비”로 시작하여 “오! 한강”과 “벽”으로 이어지는 허영만의 리얼리즘의 계보는, ‘시대와 사람들’에 관한 완벽한 구현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특히 허영만이라는 작가를 리얼리즘 미학의 선구자로 불리게 한 “오! 한강”과 허영만 리얼리즘의 완성점이라 부를만한 “벽”은 그 스토리와 연출, 캐릭터에 있어 수많은 그의 작품 중 단연 발군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관심이 없다. 공부도, 정치도, 민주화도, 그 어떤 대화도, 낭만도, 사랑도... 그리고 쾌락은 지긋지긋하다. 마치 고문과도 같다. 그러나 욕정은 끊임없이 고개를 쳐든다.’ 스물넷에 생의 절망에 빠진 신석기는 대재벌 오광그룹 신춘호의 막내 손자이자 학업에 관심 없는 경영학과 4학년생으로 절망과 냉소주의에 빠진 무신론자이다. 1980년 봄, 시대는 민주화의 외침과 함께 온 거리가 최루탄 연기로 자욱했고 그 뜨거운 혼란의 한 가운데에서 아무 것에도 관심 없이 오직 한 순간의 쾌락에만 몸을 맡기는 신석기의 모습은 우도 좌도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의 외로움과 불안함이 극적으로 드러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신석기, 대한민국 국민에다 남자였고 대학 4학년생이었으며 스스로 절망했다고 믿고 있었다. 스물 네 살이면 진짜 절망을 알기엔 아직 부족한 나이일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랭보라는 시인은 겨우 스물이 될까 말까한 나이에 이런 글을 썼었다. ‘나는 내 정신 속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희망을 사라지게 하기에 이르렀다’ 학교 같은 건 진작부터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래도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복받쳐 올랐다. 랭보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저주받았다. 나는 조국이 무섭다. 가장 좋은 것은 잘 취해 해변에서 자는 것이다.’ 그래 자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할 일은 죽을 때까지 잠자는 것이다. 위의 나래이션과 함께 1980년 봄, 서울의 혼란스러운 풍경을 카메라가 옆으로 살짝 비껴가듯 훑고 지나가며 주인공 신석기의 허무한 눈을 보여주는 “벽”의 도입부 연출은 정말 한국만화사상 가장 뛰어난 도입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웃사이더”라 불리는 인간은 정말 저런 모습일거야 라고 생각하게 한 이 도입부의 연출 하나로 나에게 신석기는 허영만의 어떤 주인공보다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