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 (Eagle)
“침묵의 함대”, “메두사”, “지팡구” 등 주로 군사, 정치, 사회 문제를 만화의 주제로 심도 있게 다룬 작품들을 발표해온 ‘무거운 색깔’의 작가 카와구치 카이지는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어떤 이상(理想) 같은 것이 있다. “인류 공존의 키워드”라 할 ...
2006-12-20
박현수
“침묵의 함대”, “메두사”, “지팡구” 등 주로 군사, 정치, 사회 문제를 만화의 주제로 심도 있게 다룬 작품들을 발표해온 ‘무거운 색깔’의 작가 카와구치 카이지는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어떤 이상(理想) 같은 것이 있다. “인류 공존의 키워드”라 할 수 있는, 인류의 염원이기도 한 이상이지만,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평화, 공존 등의 거대한 개념에 재미있는 가상의 이야기로 살을 붙여 하나의 키워드로서 알기 쉽게 대중 앞에 던져주는 카와구치 카이지의 작품은 이상을 더 이상 공상 속에서만 존재하게 하지 않는다. 대표작 “침묵의 함대”에서 평화를 목적으로 유엔 산하에서 활동하는 핵잠수함부대, 침묵의 함대를 만들자고 주창했던 작가의 급진적인 세계관은 좀 거창하긴 하지만, 자국의 이기주의를 제어하지 못하고 날로 팽창만을 거듭하는 세계의 선진국들에게 “공존(共存)하고 싶다면 더 이상의 팽창을 멈춰라!”고 모든 작품에서 냉철한 경고성 메시지를 날리고 있다. 이런 작가의 일관된 색깔은 나름대로 열렬한 매니아 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 탄탄한 스토리와 박진감 넘치는 연출로 평단과 흥행 양쪽의 지지를 모두 얻어낸 작가이기도 하다. 카와구치 카이지의 “이글(Eagle)”은 어찌 보면 작가의 전작들에서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던 초강대국, 미국의 심장부로 파고들어 그 힘의 원천을 해부하고 잘못된 방향을 지적하는, 정치적인 성향이 매우 강한 만화로 그간 작가의 작품 속에서 등장했던 여러 명의 주인공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정치가 ‘케네스 야마오카’를 만들어 냈다. 작품의 배경은 미국의 대통령선거이며, 주인공은 일본계 이민 3세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변호사 출신의 정치가 케네스 야마오카이다. 작품을 이어가는 화자(話者)는 케네스 야마오카의 숨겨둔 아들, 마이아사 신문의 사회부 기자 죠 다카시이다. 주인공에게 치명적인 폭탄이 될 수 있는 화자의 존재는 작품을 읽는 내내 긴장감을 제공하며 스토리의 뼈대가 되는 핵심엔진이다. 이 어색하지만 단단한 부자(父子)관계를 중심으로 제 43대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라는 전쟁터 같은 무대에서 개성 넘치는 수많은 조연들이 어우러져 펼쳐내는, 박진감 넘치고 뼈대 있는 이야기들은 작가의 주장과 만화적 재미를 훌륭히 결합시킨 성공 사례로 여러 독자제현들에게 감히 추천할 만하다. “우리 미합중국은 이민(移民)이 만들어낸 나라입니다. 이민이란 뭘까요? 자기 미래를 자신의 의지로 개척해가는 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흐르고 있는 이민의 피에 호소하려 합니다. 우리 미래를 우리 자신의 의지로 개척하자는 것! 인종이나 종교, 민족의 차이를 넘어, 용기와 희망과 긍지를 가슴에 담고, 어떠한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21세기로 출항하려고, 나는 제 43대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려 하는 것입니다!” 뉴욕주 선출 민주당 상원위원 케네스 야마오카가 뉴욕의 브로드웨이 길목에서 대통령 선거 출마의 첫 유세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작품 첫 머리에는 작가가 파악한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힘의 원천과 그 초강대국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다 나와 있다. 이것이 이 작품의 주제이며 작품의 배경이자 이야기이며, 작가가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