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호 (飛虎)
만화방에 공급되는 성인만화들을 보면 그 왕성한 생산력에 감탄할 때가 있다. 일판만화와 달리 페이지가 좀 많은 것을 빼면 사실 일판만화와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일판만화와는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인지 매일 공급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1-2주에 시리즈물이 한 권씩은 나오...
2005-08-17
이승남
만화방에 공급되는 성인만화들을 보면 그 왕성한 생산력에 감탄할 때가 있다. 일판만화와 달리 페이지가 좀 많은 것을 빼면 사실 일판만화와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일판만화와는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인지 매일 공급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1-2주에 시리즈물이 한 권씩은 나오는 것을 보면 공장제 만화의 제작방식은 포드주의를 연상시킨다. 강산호 글, 안무현 그림의 『비호』는 공장제로 제작된 성인만화다. 만화방의 책장 한 구석에서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던 이 만화가 만화규장각의 리뷰 목록에 올라 나에게 선택되는 우연성의 미학 덕분에 나는 지금 이 만화에 대한 글을 쓴다. 현재 3권까지 나온 이 만화의 내용은 8살 때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한국에 온 여주인공 비가 일본의 자금 지원을 받는 폭력조직 호사회의 추적을 피하면서 고종황제가 남긴 무술 비급을 찾는 과정에서 운명의 남자 강호를 만나는 과정까지를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공장만화가 그렇듯이 성인만화의 특징은 그림보다는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잔가지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일정한 읽기 속도를 유지할 수 있게 칸 구성도 단순하다. 몇 번의 눈요기를 위해 정사장면을 넣지만 그렇다고 독서의 속도를 방해할 정도로 길게 묘사되지도 않는다. 이런 특징들로 인해 성인만화는 질이 떨어지는 만화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대중문화로서 만화는 다양한 수위의 작품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예술성이 있는 작품이 있는가하면 상업성과 오락성을 추구하는 작품도 있게 마련이다. 성인만화는 그 나름대로 20-30대 남성이라는 확실한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독서방식에 맞는 만화는 스토리가 빠르게 전개되면서 한번에 전체 작품을 볼 수 있는 분량이어야 한다. 그래서 성인만화는 독자의 읽기 습관에 맞게 4-5권 정도로 완결되는 경향이 있고, 그 분량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종결시켜야 하기 때문에 스토리 전개가 빠를 수밖에 없다. 『비호』 역시 이런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스토리의 설정이 조폭 드라마의 형식에다 무협만화의 요소를 섞어 일반적인 조폭 만화에서 변화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황실에 전해지는 무공 비급, 천골의 기운을 타고난 강호, 여주인공 비가 성관계를 통해 의식을 잃은 강호에게 태양진기를 전수하는 방식, 비에게 전수 받은 태양진기로 인해 내공이 강해진 강호 등 무협만화의 코드를 집어넣어 현대물에 변화를 주고 있다. 이런 스토리라인은 『도시정벌』 시리즈의 히트 이후 고정화된 패턴이다. 완벽한 능력을 가졌지만 왠지 삐딱한 성격의 주인공이 조폭 세계, 정치권, 비밀조직 등을 모두 섭렵하며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설정이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는 성인 독자들의 기호에 맞기에 계속 반복되고 있다. 성인만화가 계속 나오는 것은 남성 독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상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