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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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구 (斷口)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도 적(敵)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적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한 가지는 우리편이 ‘정말’ 아닌 경우이다. 즉 우리편이 앞으로 전진하는데 있어서 사사건건 반대하거나 혹은 우리편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나머지 하나는 사실 우리의...

2004-12-16 김성훈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도 적(敵)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적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한 가지는 우리편이 ‘정말’ 아닌 경우이다. 즉 우리편이 앞으로 전진하는데 있어서 사사건건 반대하거나 혹은 우리편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나머지 하나는 사실 우리의 적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편의 단결을 위해서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적이다. 후자의 경우, 시간이 흐르면 ‘시대의 희생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단구』에 등장하는 만신무사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실 잘못한 일이 없다. 다만 후환이 될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쿠가이의 권력자들은 그들을 몰살시키려 한다. 변방으로 임무를 부여받고 떠나는 길에 암살을 당하는 야랑이 그 희생자다. 야랑은 아무 잘못도 없이 죽임을 당한다. 말하자면 시대를 잘못 만나 죽게 되는 것이다. 그는 우리편에 악한 일을 행해서 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음모에 의해 ‘마녀사냥식’ 처치의 대상이 된 다. 마찬가지로 호라칸과 야키 역시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될 운명에 처해진다. 사람들은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이들이 있다면 공들여 구분 짓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타인을 구분시켜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시키고자하는 것은 인간이 찾아낸 가장 비겁한 자기증명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나와 다른 수준, 나와 다른 학교, 나와 다른 지역으로 사람들을 구분시키고 있다. 『단구』에서 만신무사를 일반인들과 구분 지어 토벌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바탕에도 이러한 비겁함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비겁함을 공유하는 이들은 돈에 양심을 파는 자들이다. 『단구』에서도 돈 몇 푼에 양심을 파는 자들이 등장한다. 변방으로 향하는 야랑과 바투의 길을 막아 세우고 창과 칼을 휘두르는 수많은 이들이 그들이다. 중세시대의 마녀 화형식에서 손을 흔들며 환호하던 군중들의 모습 그대로다. 손을 흔들지 않으면 자신들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내가 살기 위해서는 만신무사를 죽여야 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만신무사들이 살 수 있는 곳은 쿠가이의 질서를 벗어난 곳이어야 한다. 작품에서 그곳은 마누트다. 마누트는 어떠한 신분이라도 무예만 뛰어나면 환영받는 곳이다. 쿠가이의 질서를 해칠 위험인물들도 마누트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마누트는 기존질서와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다. 만신무사의 신분으로 살아남은 호라칸과 야키가 이제 밟아야 할 땅이 마누트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에게 쿠가이가 죽음의 땅이라면, 마누트는 생명의 땅이기 때문이다. 한편, 작품 안에서 드러나는 신분의 위계질서는 확실하다. 바투는 야랑을 충심으로 모셨고, 야랑 역시 자신보다 계급이 우위인 총수의 명령에 한마디 대꾸 없이 따른다. 이런 계급적인 충성심은 만신토벌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시야트를 비롯하여 몰이꾼으로 들어온 세 명의 백정은 자신의 주인인 유리를 따르며, 유리는 유달 앞에 고개를 숙인다. 반면, 자신의 주인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과의 상하관계는 철저하게 힘의 우위에 의해 주도된다. 야랑에 충직했던 바투는 총수에 대하여 안하무인이며, 몰이꾼은 자신들을 백정이라 무시했던 토벌대 부장을 가차없이 베어버린다. 법과 질서가 사회적인 시스템으로 강건하게 짜인 시대가 아니라 힘의 논리가, 권력의 위계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다. 누군가 인간만이 자신의 동족을 살육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맹수들도 다른 종족을 사냥하지만, 결코 자신의 동족을 죽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동물들은 배고프지 않으면 쓸데없이 살육을 일삼지는 않는다. 가장 기본적인 먹이사슬만 지키고 살아간다. 반면, 인간만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며 살아간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타인을 헤치고, 자신의 동족임에도 살인을 일삼는다. 『단구』는 이처럼 자연법칙을 벗어나 살육을 일삼는 인간들의 행태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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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만화 칼럼니스트
《만화 속 백수이야기》, 《한국 만화비평의 선구자들》 저자
http://blog.naver.com/c_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