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만화의 고전탐구 - 데빌맨
데빌맨>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1972년에 발표된 이 만화가 후배나 동료 만화가와 수많은 업계인 그리고 조형관계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이제 와서 다시 말하는 것이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30년 가까이나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잠자고 있던 그것은 세기말의 혼돈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다양한 형태로 붐을 일으키며 부활했다. 단테의 <신곡>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만들어 낸 세계관과, 소년만화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폭력 묘사, 광기에 찬 캐릭터와
2001-09-01
편집부
<데빌맨>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1972년에 발표된 이 만화가 후배나 동료 만화가와 수많은 업계인 그리고 조형관계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이제 와서 다시 말하는 것이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30년 가까이나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잠자고 있던 그것은 세기말의 혼돈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다양한 형태로 붐을 일으키며 부활했다. 단테의 <신곡>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만들어 낸 세계관과, 소년만화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폭력 묘사, 광기에 찬 캐릭터와 파격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한 스토리 전개. 당시의 주류를 이루던 꿈과 희망에 가득 찬 소년만화들과는 분명한 선을 긋는 작품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당시 만화계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이 만화는 당시에는 일반독자였을 잠재적 작가군에게 영향을 주어 10∼20년 뒤의 만화계 (혹은 관련된 모든 업계)의 흐름을 제시한, 말하자면 예언서와 같은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토가시 요시히로, 테라다 카츠야, 이와아키 히토시 등 그 영향을 받았다는 작가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나가이 고라고 하면 보통 연상하게 되는 것이 폭력과 광기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나가이 고의 출발점은 개그만화이다. <파렴치 학원>, <켓코 가면>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변태적 개그만화들은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던지며 뜨거운 감자가 되곤 했었다. 그런 그가 언제부터인가 폭력성을 전면으로 내세워 변신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노선 변경 이후 그는 신과 악마라는 주제를 지속적으로 다루어 왔다.
<마왕 단테>를 시발로 일반적인 선악 개념을 뒤집어버린 악마관(?)은 이 작품 <데빌맨>을 거쳐 <마징가 Z>에까지 이어진다. 신을 외계에서 온 침략자로, 악마를 지구의 선주민으로 설정한 <마왕 단테>에 이어 <데빌맨>에서는 신-천사-악마-인간 등의 관계가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체계를 잡아나간다. 또한 <데빌맨>은 이후 <바이올런스 잭>, <데빌맨 레이디>등으로 이어져 나가이 고 월드라고 일컬어지는 세계관을 구축하는 초석이 된다.
<데빌맨>에 채용된 코드들은 이상하게도 현재의 트렌드라고 할만한 것들이 많다. 당시로서는 도저히 메이저라고 할 수 없을 것들...예컨대 동성애, 정체성 상실, 종말론, 엽기적인 바이올런스 등이 그것이다. 대마신 사탄은 양성구유이지만, 그는 인간의 남자 아스카 료로 환생했다. 몸은 남자이지만 정신은 양성인 그대로인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비로소 밝히고 있지만 사이사이에 나오는 아키라에 대한 료의 묘한 감정의 추이는 내심 은근한 기대를 품게 만든다. 그리고 주인공인 데빌맨 후도 아키라는 격전이 계속됨에 따라 데몬의 본성에 조금씩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필사적으로 인간으로 머물러 있기 위하여 미키를 사랑하는 그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언제 스스로의 가치를 잃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그것과 닮아있다. 인간을 지키기 위하여 데빌맨이 되었던 그는, 인간이 지킬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스스로의 존재가치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그는 사랑하는 여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인간으로 머물 것을 결의하나 그와 동시에 사랑하는 여성 마키무라 미키를 잃게 된다. 이제는 살아가야 할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그는 원한다면 그대로 악마에 편입되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악마인간"이라는 것에 눈을 뜬다. "악마인간"인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정체성을 의심받는 것은 아키라 뿐만이 아니다.
인류는 다들 평범한 서민과 같은 모습으로 머물러 있었지만, 악마들의 무차별 합체가 자행된 이후 악마성을 드러내며 서로를 사냥하고 자멸해간다. 요조 시레누를 사랑했던 데몬 카임은 데몬에게는 사랑이 없다라는 통념을 깨고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숨조차 내던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후반부의 인류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아마게돈에 이르는 종말론의 차용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폭력성은 더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현재의 트렌드들이 융합되어 있었기에 <데빌맨>은 추억 속의 낡은 앨범이 아닌, 여전히 유효한 컨텐츠로써 스스로를 정제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