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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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TRAUMA)

영어사전에서 trauma의 의미를 찾아보면 ‘정신적 외상, 혹은 쇼크’라고 나온다. 즉 어떤 사건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그것을 경험한 이로 하여금 심리적인 혼란상태를 불러오는 것을 말한다. 가령, 귀여워서 앞다리를 올려보라고 손을 내밀었던 강아지에게서 ‘꺼져 병신’이라...

2004-08-26 김성훈
영어사전에서 trauma의 의미를 찾아보면 ‘정신적 외상, 혹은 쇼크’라고 나온다. 즉 어떤 사건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그것을 경험한 이로 하여금 심리적인 혼란상태를 불러오는 것을 말한다. 가령, 귀여워서 앞다리를 올려보라고 손을 내밀었던 강아지에게서 ‘꺼져 병신’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당신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혹은 직장상사에게 싫은 소리 들었다고 회사 사무실에서 후임과 소주판을 벌리고 있는 직장인의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만화 『트라우마』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진행시키고 있다. 천연덕스러움을 넘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갑작스런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고 있다.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정신적 충격은 대개 일상적인 공간들, 일테면 병원·골목길·동네·학교 등 우리 주위의 평범한 곳에서 일어난다. 말하자면 충격적인 일들은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옆에서 언제나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시간에 따른 미래와 과거의 공간이 상정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간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틀을 깨뜨리는 것’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선입견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렇게 되겠지’라고 예상했다가는 뒤통수를 맞기 십상이다. 그래서, 『트라우마』에서는 고정된 상상력은 허락지 않는다. 수술대에 오른 환자에게 마취를 시키면서 어떤 수술이 진행될지 두근거리는 독자에게 ‘세계최초 불면증 마취시술’이라는 내레이션을 날려 독자의 얼을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것은 책 중간중간에 소개된 등장인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별히 작가는 ‘이우영’이라는 인물을 『트라우마』의 주인공으로 소개한다. 독자가 작품 속에서 이 인물을 찾으려면 눈을 부릅뜨고 찾아야 한다. 최다출연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인물. 뚜렷하게 잘난 인물도 아니고 뚜렷한 로맨스나 확실한 개성을 가진 인물도 아니다. 그저 옆집 아저씨, 뒷집 총각처럼 평범하게 생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선입견을 무너뜨리고 있다. 동시에 현실 속의 주목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주인공임을 은연중에 말한다. 『트라우마』는 발단-전개-절정-결말로 이어지는 4컷 만화의 전형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즉, 평범하게 시작된 이야기가 절정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이나 해석으로 진행되어 결말에 이르러 평범하지 않은 개그를 이끌어낸다. 반전의 묘미를 살리며 독자들을 한껏 웃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말하자면 4컷 만화가 4장의 구성으로 확대되어진 형태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트라우마』는 스토리 구성의 교과서라고도 부를 만하다. 그래서, 『트라우마』가 주는 정신적 외상은 전혀 뜻밖의 결과에서 존재하게 된다. 예측할 수 없었던 결론, 산뜻한 플레이로 주심으로부터 그린카드를 받지만 이미 골대를 막아버린 상대편선수들의 앞에서 절규해야 하는 페어플레어의 심정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트라우마』라는 작품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작가 스스로 신문연재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시작했을 만큼 ‘준비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연재경험이 없었던 신인에게 쉽사리 지면을 제공할 신문사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 수로 인터넷을 통해 개인 홈페이지에 띄었던 것이 네티즌 사이에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고, 작품을 올린 지 한 달만에 연재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어쩌면 작업 초기에 있었던 이런 에피소드도 일종의 ‘트라우마’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오늘도 꿈을 꾼다. 비록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지라도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쩌면 행복할지도 모른다. 로또 복권이 당첨되어 자신을 갈구는 상사에게 “회사 확 사버린다”며 일갈하는 꿈이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라도 일단 꿈꾸는 것만으로도 통쾌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단순히 트라우마가 아니라 작가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카타르시스를 대신해 주는 것이다.
필진이미지

김성훈

만화 칼럼니스트
《만화 속 백수이야기》, 《한국 만화비평의 선구자들》 저자
http://blog.naver.com/c_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