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교정 단편시리즈 (피리 부는 사나이)
자신만의 색깔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 프로페셔널이라는 이름의 인종이 존재하는 어느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특히나 만화가에게 있어서 자신만의 색깔, 즉 개성이라는 것은 생명과도 같다. 독자들에게 한눈에 그 작가만의 그림, 그 작가만의 이야기라는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는 만...
2004-05-18
조정민
자신만의 색깔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 프로페셔널이라는 이름의 인종이 존재하는 어느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특히나 만화가에게 있어서 자신만의 색깔, 즉 개성이라는 것은 생명과도 같다. 독자들에게 한눈에 그 작가만의 그림, 그 작가만의 이야기라는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는 만화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큰 이유만을 놓고 보았을 때도 이것은 절대진리에 가까운 사실이다. 그러나 항상 가장 원칙적인 것이 가장 지켜지기 어려운 법이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만의 색깔 - 즉 작가로서의 주관이 뚜렷한 만화가 권교정은 작품 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품고 있는 귀중한 존재이다. 바로 그 자기 색깔의 초기형태를 볼 수 있는 단편집인『붕우』에서는 표지 안쪽에 짤막한 작가 평이 실려있다. 거기에서 권교정은 위에서 이야기한 자기만의 색깔에 더불어 동화에 대한 탁월한 재해석 능력, 그리고 그로 인해 매니아 군단을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편협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0년 출판된 최신작인『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에서도 역시 비슷한 해설과 더불어 자기 색깔이 뚜렷한 작가라는 평은 확고하게 살아있다. 또 다른 단편집인『적월전기』에는 1997년 그녀를 상업지에 데뷔하도록 만들어 준『메르헨, 백설공주와 그 계모에 관한』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단편이 실려있다. 옛 고전과 동화에 대한 재해석으로 구성된『붕우』를 감상함에 있어서『메르헨, 백설공주와 그 계모에 관한』은 권교정이라는 작가의 작품 성격과 재해석의 센스를 살핌에 있어서 더없이 좋은 이야기이다. 이 단편은 콘셉만을 놓고 따진다면 항간에 붐을 일으켰던『알고보면 무서운 그림동화』와도 일맥상통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알고보면 무서운 그림동화』가 기존의 메르헨을 당시 유럽의 사회상에 비추어 매우 사실적이고 음험하며 잔인한 이야기로 재해석했다면 권교정의『백설공주와 그 계모에 대한』은 그 이후에 이어지는 작품과도 일맥 상통하는 그녀만의 색깔 - 야릇한 여운을 남기는 가슴 따듯한,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특별한 바로 이것이 동화 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기고 있다.『붕우』에서도 역시 그러한 능력이 십분 발휘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단행본의 타이틀이기도 하며 옛 중국의 고사를 재해석한『붕우』에서는 남자들의 우정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면서도 이른바 순정만화로서 전혀 어색하지 않다. 희대의 악역인 후크 선장에 대한 기발한 재해석을 통해 역시 순정만화로서의 멋진 결말을 보여준『피터팬』역시 속표지의 해설 그대로 뭔가 생각할 거리를 남기면서도 편안한 그야말로 가슴 따듯함이 남는다. 오버하지 않지만 독자에게 다가오고, 엉성한 듯 보이지만 논리적이며, 강요하지 않지만 따뜻하고, 의도하지 않지만 철학적이고, 꽉짜인 듯 보이면서도 헐렁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권교정이라는 만화가의 이러한 기본적인 스타일은『붕우』한 권에서도 충분히 만끽 할 수 있다. 가는 펜선을 기초로한 섬세하면서도 맥이 풀린 그림체는 한마디로 어정쩡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지만, 어정쩡하다는 것이 비난이 아닌 칭찬이 되는 드문 경우로서 권교정의 그림체는 또한 그녀의 이야기가 편안하다는 느낌과 상통되기도 한다. 삶과 인생, 그리고 사랑에 대한 고찰이라는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테마를 다루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드문 경우로서 만화가 권교정의 이후를 주목함에 있어『붕우』는 한번쯤은 꼭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