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를 부탁해』는 소설가 박서련과 만화가 정영롱이 협업한 결과물이다. 이런 애매한 표현을 사용한 건 전반부를 소설로 후반부를 만화로 그려낸 이 작품을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싫어서다. 작품의 후기에서도 언급되듯, “만들어가는 과정”이 흥미로운 이 작품에서 어쩌면 본질은 그 내용에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소설이자 만화일 수도 있고 혹은 소설이면서 만화, 만화이면서 소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는 이러한 협업의 형식 자체가 작품 감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독자가 하는 일은 단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이것을 ‘어떤’ 이야기로 규정하는지에만 그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구성은 크게 두 개다. 전반부가 제사 코디네이터인 권수현의 시점으로 쓰인 소설이라면 후반부는 친구인 정서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만화다. 수현은 정서의 1주기가 되어 제사를 지내러 가며, 수현이 정서의 집에 이른 시점에서 이야기는 정서의 시점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구성은 특히나 영화에서 대화 장면을 구성하는 쇼트와 리버스 쇼트, 혹은 『엄마를 부탁해』로 대표되는 한국 소설의 시점 쇼트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는데. 전반부에서 수현에게 고찰의 대상이었던 정서가 후반부에서는 곧바로 화자가 되어서다. 이른바 이 작품은 인물의 마음이나 심정을 유추하기보다 곧바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정답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형식의 전환에서 피어나는 무언가가 있다.
『엄마를 부탁해』가 가족으로서 결여된 것을 엄마의 실종이라는 사건을 통해 연결했다면, 『제사를 부탁해』는 두 사람을 위해 사건을 서술하지 않는다. 산 사람은 소설로 서술되고 죽은 이는 만화로 그려진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마치 산 사람은 관찰되고 죽은 이는 비쳐진다는 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독자인 우리에게 이것은 관찰과 목격의 형식에 더 가깝다. 전반부에 수현은 정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지만 끝내 그녀의 속내를 다 알지는 못한다. 마치 추리게임의 텍스트 출력물처럼 정서에 대한 ‘입장’은 하나의 관찰적 시선으로써 서술되고 또 표현되고 있다. 반면 후반부에 정서는 자신이 어떤 상태와 마음에 놓였는지를 이미지로 보여주려 한다. 표정과 태도에서 다양한 감정이 드러나며 또한 전반부에는 단순한 배경적 서술로만 자리하던 ‘문 닫힘’을 후반부에서는 정서가 화를 내는 묘사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즉 전반부가 정서를 관찰한다면 후반부는 정서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매체의 형식에 관한 물음으로 바꾸어보아도 좋지 않을까. 소설이 관찰한다면 만화는 드러낸다. 이는 크게 볼 때 문자와 이미지의 차이이면서 각각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의 다름이기도 하다. 인물의 성격에서도 이러한 부분이 잘 드러난다. 수현은 제사 코디네이터로서 많은 이의 죽음을 접하지만 여기에 자신의 감정이나 판단을 투입하지는 않으며 다만 관찰할 뿐이다. 이는 정서에게 ‘냉정하다’고 말할 만한 계기가 되지만, 되려 정서의 죽음에만 감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한편으로 정서는 평소 실없는 말을 자주 하고 다녔기에 그녀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말을 했을 때도 주변인들은 쉽게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즉 평소 그녀는 무언가를 잘 보여주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진정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형식의 전환에서 등장인물의 전회를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관찰자 입장에 있던 수현이 단지 정서를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녀를 이해하는 과정. 비쳐지는 사람이었던 정서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유령이 됨으로써 진정한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 이는 직접 서술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소설이 아닌 만화의 입장에서 다뤄지기에 하나의 실험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만화를 보조하는 처지인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소설은 수현이 아닌 독자를 상정함으로써 어떤 이들 모두가 단지 ‘비쳐질 뿐’이고, 우리는 그걸 따라가는 입장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우리는 작품을 ‘어떤’ 형식으로 규정함으로써 따라가는 방향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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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써내어 읽는 이의 마음에 떠오르게 한다. 만화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내어 읽는 이의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한다. 표현과 방법은 다를지언정 두 이야기 예술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마음, ‘진심’이다. 물론, ‘보이지 않는 것’이란 것은 정말로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현상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유령’과 같은 것. 제사상 코디네이터 권수현과 거짓말쟁이 유령의 진심을 그리는 <제사를 부탁해-보이는 이야기>가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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