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
* 대상: 불행의 가능성에 대한 노트 - 「집이 없어」론, "작품: 집이 없어"
* 최우수상: 학원 액션물에 대한 또다른 시선 ONE, "작품: ONE"
* 우수상: 작품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적 약자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 "작품: 닭은 이외로 위대하다"
* 우수상: 무제(無題), "작품: 요나단의 목소리"
* 신인상: 조각난 인간을 향한 응시와 그 개인화 ― 연상호의 만화 『계시록』 읽기, "작품: 계시록"
* 신인상: <웹툰 약한영웅 평론> 경계 너머의 소년들, "작품: 약한영웅"
대상: 불행의 가능성에 대한 노트 - 「집이 없어」론
[ 와난 작가의 <집이 없어> ]
0. 불행의 가능성
로렌 벌렌트(Lauren Berlent)가 훌륭하게 지적했듯이,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좋은 삶’에 대한 집착은 ‘잔인한 낙관주의(creul optimism)(1)’에 기반한다. ‘좋은 삶’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예상되는 대상을 욕망하도록 만들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행복’에서 탈락하게 만드는 장치로서 기능하다. 신자유주의의 가속화에 따라 좋은 삶이라 여겨지기 위해 개인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가혹할 정도로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좋은 삶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삶으로서 멀어지고 있다. 그러나 욕망의 대상은 그것을 얻기에 어려운 정도와 비례하여 환상적이고 좋은 것으로 여겨지기에, 좋은 삶은 개인의 실제적인 삶을 완전히 소진시키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궁극적인 삶의 목표로 설정된다.
좋은 삶에서 결여될 수 없는 것으로서 ‘가족’은 단어 자체로부터 친숙함, 안온함, 다정함이라는 긍정적인 가치를 연상시킨다. 가족은 하나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구성원들에게 위와 같은 긍정적인 가치를 환기하고 순환시키는 통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정치적, 계급적, 개인적으로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존재일지라도, 그에게 가족이 없다면 그는 결코 ‘좋은 삶’을 누릴 수 없으며, 따라서 행복할 수 없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이와 같은 행복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서 가족을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지적한다. “행복의 이상은 언제나 집안에서 구현된다.”
행복은 널리 알려진대로 개인이 삶에 대해 가지는 주관적인 만족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제시된 조건을 충족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정치적인) 효능감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행복은 개별자가 사회의 조건과 무관하게 마음의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 조건의 충족 상태를 뜻한다. 이를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는 사라 어메드(Sara ahmed)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복이란 “우리가 어떤 것들을 마주치기도 전에 그것들을 좋은 것으로 만드는 방법(2)”이다. 즉 우리는 ‘어떤 것’을 경험하기도 전에 사회적으로 규정된 가치에 따라 ‘어떤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 예상하여 그것을 욕망한다.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는, 그 존재의 감정 상태와 무관하게 불행한 자로 여겨진다. 행복의 조건이 박탈되어 있는 자들은 언제나 ‘불행한 자’로 생산되는 것이다. 그 ‘어떤 것’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가족이다.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 충족해야 하는 조건을 폐기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불행할 자유’이다. 불행을 인생의 궁극적 실패이며 치료해야 하는 비정상적인 상태로 여기는 긍정 심리학의 태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사회가 우리를 불행한 자로 생산한다면 우리에게는 그 불행을 충분히 향유하고 불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대답하는 것은 ‘잔인한 낙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행복은 우리에게 언제나 하나의 길로 수렴될 것을 지시한다. 행복은 좋은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좋은 것이 행복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복의 궤도에서 이탈하여 부정한 것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자들의 이야기이며, 불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때의 가능성이란 불행이 예정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가능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긍정적인’ 선택지에 머무르지 않고 긍정의 바깥까지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가능성이다.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사유와 운동(La Pensée Et Le Mouvant)」에서 ‘가능성’의 의미를 ‘관념 형태 하의 선재(先在)’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부정확하다고 지적한다. 가령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창조하기 이전에도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창조할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는 진술은,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현실화한 이후에만 사용할 수 있는 퇴행적 용어라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무엇인가 가능하다’는 진술은 그 무엇이 현실화된 이후에, 즉 ‘시간의 진행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끊임없이 과거가 현재에 비추어져’ 만들어진 거짓 진술이다. 우리는 그것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오직 그것이 현실화된 이후에만 깨달을 수 있다. 현실화될 수 없다면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능성에 무엇인가 덧붙여져 실재화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실재화된 이후에 그것에 과거를 덧붙여 ‘가능성’이라는 용어를 생산한다. 가능적인 것이 실재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 자체가 자신을 가능적인 것으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화되기 이전의 가능성에 대한 진술들.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능성은 현재에 따라 무한히 열려있음에도, 현재에서 과거를 회고하여 현재에 ‘이미’ 발생한 사건을 과거에 투영하거나, 과거를 임의로 분절하여 그것을 예측에 따라 재배열하여 ‘가능성이 있다’고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다. 가령 비행 행위를 저지른 아이에게 “애가 싹이 노랗네.” 또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비행 행위가 이루어진 뒤에 현재를 통해 미래를 재단하는 부당한 방법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능성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나 행복한 식탁에서의 저녁 식사, 크리스마스와 어린이날의 나들이 등과 같이 ‘행복한 가족’이 결여된 아이는 한 번의 비행 행위만으로도 ‘싹수가 노랗고 불행할 아이’로 재생산된다. 비행을 저지른 아이가 불행할 아이인 것은, 그가 비행을 저지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시작부터 사회에서 요구되는 행복의 조건을 결여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애초에 ‘행복할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다.
한편 최근 웹툰계의 주류적 경향인 ‘사이다(3)’ 장르 속에서 그려지는 ‘싹수가 노란’ 청소년의 모습은 법적 미성년자임을 악용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영악한 모습이다. 작품 속에서 (비행) 청소년들은 사이다 서사를 위한 제물로 사용되는데, (부당한) 법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은 그들에 대한 폭력(=처벌)을 정당화한다. 비행 청소년들에 대한 합당한 폭력은 ‘이미 그리고 언제나’ 정당화된 처벌이라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옹호는 금기시된다. 청소년들은 사이다 서사를 위해 악인으로 생산되며, 그들의 가능성을 박탈당한다. 사이다 웹툰은 청소년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소거한 채 악인 그 자체로서 청소년을 부정한 것으로 재생산한다. 청소년들의 비행 행위에 대한 실질적인 원인이 학대 또는 방치에 있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을뿐더러, 실제 청소년들의 모습까지 웹툰이 생산하는 비행 청소년들의 모습으로 변형된다. 사이다 웹툰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비행 청소년들을 모방한 것이라 변명하면서 비행 청소년들을 맥락이 소거된 무조건적인 악인으로 변형시켜, 현실을 집어삼킨다.
부분적인 비약이 허용된다면, ’의처증에 걸린 남편은, 부인이 실제로 바람을 피더라도 병적이다.’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유명한 진술을 응용해보자. 비행 청소년들이 웹툰에서 그려진 모습처럼 실제로 법적 지위를 악용하여 영악하게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그것을 처벌의 정당화 수단으로만 활용하는 작품은 문제적이다. 고전적인 응보주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정의 구현’이 범죄의 재발 방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표준적인 비판점은 차치하더라도, 법적 지위를 악용하는 비행 청소년들은 힘을 통한 굴복이 아니라면 반성하지 않을 것이라는 간단한 전제로부터 도출되는 ‘정당화된 폭력’은 일종의 메시아주의에 가깝다. 폭력만을 진리로 삼는 종교적 태도는 가장 단순한 비관주의에 가깝다. 자신 앞에 주어진 끔찍하고 부정한 존재들을 소거하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본능적이기에 폭력적이다. 비행 청소년들이 실제로 끔찍한 존재일지라도, 그들을 폭력을 통해서만 처벌하고, 눈 앞에서 소거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방식이며,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비행 청소년들의 비행 행위를 다루기 위해서는 그들 앞에 놓여있는 선택지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즉 그들이 실제로 끔찍하게도 악하고 비열한 짓을 일삼더라도 그 행위로부터 그들의 가능성을 재단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처해있는 현재의 선택지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그들의 진정한 가능성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와난 작가의 「집이 없어」(네이버 웹툰)는 청소년들의 악한 모습과 더불어 그들이 처한 부당한 상황과 맥락을 끈질기게 묘사한다. 따뜻하고 안온한 집이 없는 불행한 청소년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집이 없어」는 일반적인 청소년 웹툰과는 궤도를 달리한다. 「집이 없어」는 극 초반부터 도저히 구제될 수 없는 청소년인 백은영과 우울과 무력감에 빠진 고해준을 등장시키며 웹툰을 시작한다.
백은영과 고해준
백은영은 행복의 조건을 모두 결여한 존재처럼 보인다. 백은영은 ‘집 같지도 않은’ 텐트 속에서 친구들과 모여 살고, 고해준의 지갑을 훔치고 훔친 사실이 발각된 뒤에도 사과를 하지 않으며, 적반하장으로 고해준을 모욕한다. 백은영은 무례하고 천박하고 음흉한 사기꾼과 같은 모습으로 거짓말에 능숙하고 습관과 같이 물건을 도둑질한다. ‘불량 청소년의 비행 행위’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은 백은영의 행동에는 보다 복잡한 맥락이 숨겨져 있다. 모범생인 고해준과 불량 청소년인 백은영의 과거 회상으로 이루어지는 ‘도둑질’ 소재는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실제로 도둑질을 해 붙잡힌 고해준과, 같은 시절 도둑질을 하지 않았음에도 도둑질을 했다는 누명을 쓴 백은영은 처해진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삶으로 진입한다. 고해준의 어머니는 자신에게는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며, 고해준에게 잘못을 시인하게 하고, 문방구의 주인에게 고해준의 도둑질에 진심으로 사과하면서도 고해준의 뺨을 때린 문방구의 주인과 싸우기 시작한다. 싸움의 과정에서 문방구의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도둑질에 뻔뻔하게 거짓말까지.. 애가 싹이 노랗네 저런 애들은 진짜 평생 저래 앞으로가 뻔하다(109화)’
비행 행동으로부터 아이의 삶을 재단하는 어른들의 평가는 자기실현적 예언의 형태로 실제로 그들이 예측한 삶을 살도록 아이를 변형시킨다. 그러나 고해준에게 예측되는 불행한 삶을 막은 것은 어머니의 다음과 같은 대사이다. “아무리 밉고 화난다 해도.. 어떻게 때릴 수가 있어.. 이렇게 작고 약한데..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있어..(109화)” 작고 연약하고 미숙한 아이에게 손을 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은 잘못을 저지러지 않은 일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확신을 아이에게 심어주는 어머니의 교육은 아이가 처한 상황과 맥락을 변화시킨다.
반면 물건을 실제로 훔치지 않은 백은영은 부모로부터 교육받지 못한다. 단지 ‘하고다니는 꼴’ 때문에 이어폰을 훔쳤다는 누명을 쓴 백은영은 가게의 주인으로부터 자신을 열렬히 변호하지만, 가게의 주인이 부른 백은영의 아버지는 백은영을 심하게 구타한 후 백은영에게 사과할 것을 종용한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아버지와 행하지 않은 잘못으로부터 반성을 배운 백은영은, 그 이어폰을 진짜로 훔친 아이를 찾아가 구타한 후에, 실제로 이어폰을 훔친다. 부모의 믿음으로부터 교정된 아이와, 부모의 불신에 의해 문제적이고 비천한 존재로 자신을 재조립한 아이를 교차 등장시키는 「집이 없어」의 구조는 비행 청소년들의 비행 행위는 과거의 맥락이 압축되어 나타난 ‘현재’라는 사실을 지시한다. 고해준은 도둑질하는 아이에서 도둑질하지 않는 청소년으로 자라났지만, 백은영은 도둑질하지 않는 아이에서 도둑질하는 청소년으로 자라난 것이다.
한편 고해준과 그의 (돌아가신) 어머니가 귀신을 본다는 설정은 「집이 없어」 서사 진행의 한 축을 담당한다. 끊임없이 자신이 무엇인가를 ‘봤다’고 말하지만 누구에게도 믿음을 얻지 못하고 그저 거짓말로 일축되는 ‘귀신’ 메타포는 웹툰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발화와 겹쳐진다. ‘제가 진짜 봤어요.’, ‘제가 훔친게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 주위 인물들의 불신으로 인해 자신의 실재적인 감각까지 의심하게 되는 청소년들의 자기-불확신은 다시 그들의 ‘현재’를 재구성한다. 비행 청소년들은 언제나 자신의 말이 거짓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그러한 인지는 그들이 진실된 말을 하지 않게 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그들의 말에 ‘거짓일 가능성’을 부여하는 순간 그들의 말은 진짜로 거짓이 된다. “말해 봐야 믿지도 않을 거 뭐하러 물어보냐.”는 백은영의 반복적인 대사는 고해준에게만 향해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외부로부터 진실과 신뢰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이다. 따라서 신뢰, 자기 긍정 등과 같은 가치가 제거되어있는 백은영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언제나 불행한 선택지이다. 고해준이 백은영을 칭찬할 때조차, 백은영은 칭찬의 가치를 부정한다. 백은영에게 긍정적인 가치를 심어주고자 고해준이 건넨 칭찬은 백은영에게 ‘평가질’로 여겨지며, 백은영은 끊임없이 부정적인 것을 택한다. 이러한 백은영의 곁에 고해준이 끈질기게 머무를 수 있는 것은 고해준도 백은영과 같이 따뜻하고 안온한 ‘집’이라는 행복의 조건이 결여되어 있는 불행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백은영에게 안도감을 주는 것은 공동의 목표인 행복을 위해 전진하는 ‘연대’라기 보다는, 같이 비참한 존재로서 불행에 ‘연루’되는 것이다. 백은영은 언제나 자신과 같이 불행에 연루된 자로부터 친밀감과 안도감을 느낀다. 스스로를 ‘도저히 구제가 불가능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백은영은 자신과 같이 ‘답 없는 인생’을 보면 기뻐한다. 그는 긍정의 경험이 모두 표백되어 끈적한 불행만 남은 자의 표본과 같다.
2. 끈질긴 화해
「집이 없어」의 특이한 점은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다투고 끊임없이 화해한다는 것에 있다. 최근의 웹툰 경향에서 ‘화해’는 고려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싸움의 대상은 무조건적인 악이기에 처단과 형벌의 대상이지, 용서와 화해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가해자에 대한 처단과 복수만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가해자의 상황과 맥락을 설명하는 것은 서사 진행을 지연시키는 컷 낭비이자, 용서는 선함을 포기하지 못하고 답답한 캐릭터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반영으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대다수의 웹툰에서 가해자들은 모든 상황과 맥락이 소거되어 있으며 목적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악을 수행하는 인물들로 설정된다. 그들의 서사는 단편적이거나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집이 없어」는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들에게 끊임없이 서사를 부여한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대중적인 요구와는 정반대로 「집이 없어」는 각 에피소드별 사건의 가해자들의 서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를 이해하는 지난하고 험난한 과정을 끈질기게 묘사한다.
가령 백마리는 고해준이 학교폭력의 피해자를 구해준 일을 교묘하게 편집하여 고해준을 가해자로 변형시켜 신문에 실는 거짓된 특종을 통해 기숙사에 들어가고자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으로 고해준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백마리에게는 어떠한 면죄부도 없어 보이는 듯 보인다. 그러나 「집이 없어」는 이후에 백마리가 처한 가정 환경을 점진적으로 제시하기 시작한다. 백마리는 오빠로부터 당하는 폭언 폭행과 아버지의 방치, 그리고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집’을 탈출하고 싶어하며, 이것이 백마리의 가해 행위에 대한 원인으로 제시된다. 무례를 넘어 폭력적인 백은영의 대사에는 아버지의 구타에 대한 트라우마와 어렸을 적의 불행이 도처에 숨겨져있다. 「집이 없어」는 백마리와 고해준의 가해 행위와 무례에 대해 구차할 정도로 변명을 늘어놓고, 그들을 끈질기게 설명하고자 한다. 「집이 없어」는 서사 진행의 속도를 포기하고 인물의 복잡한 과거를 모두 설명하고자 하는 ‘구구절절’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끝끝내 등장인물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누군가의 일기(4)를 읽으면 그 사람을 완전히 미워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된다는 한 시인의 말처럼, 「집이 없어」의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내밀한 일기를 독자들에게 집요하게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3. 행복의 조건으로서 (불행한) 가족
행복의 전제 조건으로서 ‘가족’이 유지되기 위한 핵심은 “가족을 계속해서 핵심으로 두는 것(5)”이다. 그것이 특정한 개인에게만 희생을 요구할지라도 행복하기 위해서는 가족을 자신의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한다.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은 무조건적인 정언 명령이며,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백마리는 오빠와 아빠로 이루어진 가족에서 오빠에게 구타당하고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수행하면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할 때에는 긍정적인 것처럼 힘겹게 묘사한다. (오빠는 내가 말을 안들을때는 나를 때리지만, 평소에는 잘 챙겨줘, 내가 참으면 아무 문제 없어 …) 아버지의 법과 권력을 위임받은 오빠로부터 자신이 구타당하는 것을 자기 자신이 외면하지 않으면 자신의 집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해지기에 백마리는 집에서 사는 동안 자기 자신을 온 힘을 다해 외면한다. 그러나 동시에 백마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 자체를 변화시키고자 ‘그 집’으로부터 탈출을 원하기 시작한다. 가족을 핵심으로 두려고 하지 않는 것을 넘어, 가족을 스스로 포기하고자 하는 백마리의 선택은 백마리의 고모가 과거에 한 선택과 겹쳐진다.
백마리의 고모는 그녀의 오빠 즉 백마리의 아버지에게 어린 시절 구타당한 것으로 묘사된다. ‘언제까지 옛날 일 끄집어내면서 어머니 아버지랑 연 끊고 살 거야?(53화)’라는 백마리 아버지의 물음은 행복을 위해 강제로 유지되어야 하는 가족 제도의 내밀한 모순을 제기한다. 가족의 폭행과 폭언으로 불행할지라도, 가족은 행복을 위해 유지되어야 한다. 행복의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가족은 누군가의 불행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것이다. 동시에 ‘불행한 개인’은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는 환상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기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스스로 왜곡하여 인지한다. 환상을 통해서 자신의 선택이 불행한 선택이 아니라는 ‘환상’은 어디까지나 환상이다. 사회의 조건과 무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은 자신이 처한 불행한 상황을 인지하고, 도움을 요청하거나 받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백마리의 “애초부터 내가 갈 곳이 아니었”다는 절망과 체념의 말을 ‘마리야 너는 어디로도 갈 수 있어’라는 고모의 긍정은 미성숙한 청소년인 백마리에게 가족을 포기할 수 있는 선택지를 새롭게 제시한다. 가족이 행복의 필수적 조건이라면, 마리에게는 충분히 ‘불행할 자유’가 존재한다. 역설적이게도 불행할 수 있는 자유는 백마리가 단일한 행복의 길에서 벗어나 궤도에서 이탈하여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백마리 에피소드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공민주의 엄마인 엄수현은 어린 시절 정서적 학대를 당한 인물이다. “가족끼리는 힘들 때도 서로 털어놓고 의지하는(95화)” 것이라는 가족적 환상은 미성숙한 자식에게 학대의 형태로 변환된다.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딸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희생을 자식의 역할로 강요한다. 가족 내에서 여성이라는 성별에 부여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 당연한 것이기에,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가족을 버리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행복의 각본이 배당한 역할에서 벗어난 존재는 가족의 소중함을 모르는 불행한 자로 재생산된다. 엄수현의 딸인 공민주는 이혼한 아버지의 집안일을 대신해주고자 하지만, 엄수현과 백마리는 모두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를 제지한다. 행복의 각본이 배당한 가족과 성별의 역할로부터 벗어난 ‘불행한 존재’들의 제지를 통해 공민주는 자기 자신을 행복의 제물로 삼는 것에서 벗어난다.
백은영 또한 가족으로부터 오랜 학대를 당해왔지만, 백은영과 엄마의 다툼은 사회적으로 비행 청소년의 잘못으로 규정된다. 백은영의 엄마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백은영을 아프게 ‘꼬집는’ 행위를 반복하고, 고해준은 이를 지적하지만 ‘가족 일’에 고해준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미성숙한 청소년에 대한 권리는 그의 부모만이 독점할 수 있다. 친구와 같이 연약한 관계는 신성한 가족 앞에서 무력한 것이다. 백은영에게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그곳(196화)’으로서 ‘집’은 이미 친숙함, 안온함,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백은영의 엄마는 ‘제발 다른 집처럼 한 번만 그렇게 지내주면 안 돼?’냐고 묻는다. 안정되고 행복한 가족의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두가 불행한 선택만을 반복해야 하는 가족의 내밀한 구조는 백은영의 가족에게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가족이 함께 하는 식탁은 행복한 가족의 원형으로서 제시되지만, 이를 거부하고 아버지의 폭력을 거부하는 백은영은 ‘정서 소외자(effect alien)(6)’로서 행복의 약속을 거부하는 자들이다. 백은영은 자신의 불행을 제물삼아 행복을 연기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부모의 기분에 따라 자신의 잘못이 규정되는 집에서 백은영은 사과와 화해를, 자기 긍정을 배우지 못한다. 심한 폭력을 행사한 아빠가 당장 죽었으면 좋겠다가도 다음날 맛있는 반찬을 해주면 평생을 함께 하길 바랬던, 어린 백은영이 겪은 감정의 낙차는 백은영의 현재에게 끊임없이 되돌아 와 그를 괴롭힌다. 백은영에게 가족은 언제나 문제적이며 불행한 것이지만, 반대로 사회는 가족을 벗어난 백은영을 문제적이며 불행한 존재로 취급한다. 백은영은 행복의 조건에서 벗어나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져있으며, 이는 백은영의 자기 혐오의 기원이 된다. 그러나 행복의 길에서 탈선해야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있다면 탈선된 길은 더 이상 비참한 의미에서의 불행이 아니다. 그 길은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의 가능성의 길일 것이다.
4. 불행에 머무르기
긍정의 경험이 모두 표백된 ‘불행한 자’로서 백은영은 불행한 선택만을 끈질기게 반복한다. 그는 주위에서 보내는 응원도, 도움도 외면한 채 끊임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만을 중얼거린다. 그러나 「집이 없어」는 백은영의 비관과 불행을 강제로 교화하고자 하지 않는다. 서사 진행 과정에서 백은영은 불행한 선택을 반복하지만 동시에 백은영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고해준은 그것을 ‘머뭇거리게’ 만들 뿐, 백은영을 교화하고자 하지 않는다. 고해준은 백은영을 함부로 이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처한 상황이 비슷하다고 친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불행에 빠진 자를 건져 올려 행복을 향해 전진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잔혹한 낙관주의’에 가깝다. 불행한 백은영에게 행복한 삶을 선사하고자 하는 마음은 백은영에게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런 이유에서 백은영이 강력히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백은영이 확신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확신뿐이다. 백은영에게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온전히 미워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을 충분히 미워하는 자만이 자신을 안쓰럽게 여길 수 있기에, 백은영의 자기 혐오는 자기 연민을 위한 전제가 될 수 있다.
백은영에게는 행복의 길에서 탈선한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 행복이 요구하는 규범적 틀에서 벗어나 가족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경험으로부터 백은영은 보다 다른 방식의 행복에 진입할 수 있다. 백은영의 분노는 부모의 구타로부터 비롯되지만, 사회는 부모가 구타하는 원인이 예의 없는 백은영의 분노로부터 비롯된다고 규정한다. 사회를 유지하게 하는 행복의 규제적 효과를 위해서는 폭언과 구타를 일삼는 가족을 상상하는 것보다, 예의 없는 비행 청소년을 상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는 백은영을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나 행복하지 않은 청소년으로 규정한다. 외부로부터 자신의 감정이 소외된 백은영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기꺼이 불행해지는 것이며, 불행한 자로 끈질기게 머무르는 것이다.
주지했듯이 백은영을 불행에 기꺼이 머무르도록 만든 것은, 성장 과정에서부터 발생한 외부로부터의 소외이다. 백은영의 부정적인 자기 확신을 머뭇거리게 만든 주위 어른들의 긍정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어른들은 백은영에게 ‘싹수가 노랗다.’는 말을 반복하며, 백은영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집이 없어」는 백은영의 삶적 궤도를 통해 가능성을 제한당한 일대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추적한다. 비행 청소년들의 ‘일탈 행위’에 집중하는 웹툰의 경향과 달리, ‘일탈 행위의 배경’에 집중하는 「집이 없어」의 끈질긴 과거 추격전은 ‘싹수가 노란’ 비행 청소년의 미래를 보다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5. 남겨진 것들
「집이 없어」는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백은영과 고해준에게 남겨진 수 많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서사의 진행을 지연시키고 방해한다. 안락함, 따뜻함, 연대감 등과 같이 명확히 긍정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행복의 언어들과 달리, 불행의 언어들은 자신이 지나간 모든 자리에 불쾌한 흔적을 남긴다. 질투, 비관, 우울, 실패 등과 같은 단어들은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여기 이 자리에 남아 있다는 끈적한 오물들을 남긴다. 그러나 개인의 감정은 언어가 아니라면 표현될 수 없지만, 언어로 표현되기 위해 자신의 일부 심지어는 본질까지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보자. 가령 ‘즐거움’이라는 단어는 수 많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감정들을 ‘즐거움’이라는 하나의 기호로 표상하도록 만든다. 그 과정에서 타인의 즐거움과는 다른 자신만의 즐거움은 ‘즐거움’이라는 기호로 표상되기 위해 포기된다. 그러나 불행의 언어들은 언제나 그 감정의 주체만이 겪는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게 만든다. 불행의 언어들이 남기는 ‘끈적한 오물’은 주체만이 겪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감정들이다.
「집이 없어」가 제시하는 불행의 언어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든다. 백은영이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불행한 언어는 백은영의 질투, 비관, 우울을 보다 면밀히 살피게 만들어주고, 백은영만이 가지고 있는 자기 모순적인 감정을 지속해서 포착해낸다. 하나의 길로 수렴하는 행복의 길에서 이탈할 수 있는 방법을 백은영은 자신도 모르게 개발해냈다. 그것은 불행의 언어에 끈질기게 머무르는 것이며, 자신의 불행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백은영에게 긍정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먼저 긍정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쏟아진 백은영에 대한 부정을 직면해야 한다.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을 낸 창 뿐”이라는 바그너의 말에 따르면 백은영은 불행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시작 단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집이 없어」는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지만, 등장인물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라는 암시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집이 없어」는 등장인물들의 선택지를 제한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 연재중인 「집이 없어」에서 백은영을 포함한 고해준, 김마리, 그리고 지면상 언급하지 못한 박주완 등과 같은 등장인물들이 어떠한 선택을 할지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달려있다. 우리는 그들의 내밀한 일기장은 살펴볼 수 있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오직 그들의 현재만을 반복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나의 글을 통해 「집이 없어」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더불어서, 비행 청소년들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이 활발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1) Berlant, Lauren Gail. Cruel Optimism 2011
(2) 행복의 약속 :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 사라 아메드 지음 ; 성정혜, 이경란 옮김 2021. 이하 [행복의 약속] 74p
(3) 독자가 보기에 답답하거나 전개가 느린 구간을 최소화하는 서사 진행 방식. 사이다의 쾌감에 비유한 용어. 출처 : 네이버 오픈 사전
(4) 문보영 : 일기 시대 민음사 2021. 12p
(5) 행복의 약속 88p
(6) 행복의 약속 92p
< 2023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
* 대상: 불행의 가능성에 대한 노트 - 「집이 없어」론, "작품: 집이 없어"
* 최우수상: 학원 액션물에 대한 또다른 시선 ONE, "작품: ONE"
* 우수상: 작품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적 약자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 "작품: 닭은 이외로 위대하다"
* 우수상: 무제(無題), "작품: 요나단의 목소리"
* 신인상: 조각난 인간을 향한 응시와 그 개인화 ― 연상호의 만화 『계시록』 읽기, "작품: 계시록"
* 신인상: <웹툰 약한영웅 평론> 경계 너머의 소년들, "작품: 약한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