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
* 대상: 불행의 가능성에 대한 노트 - 「집이 없어」론, "작품: 집이 없어"
* 최우수상: 학원 액션물에 대한 또다른 시선 ONE, "작품: ONE"
* 우수상: 작품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적 약자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 "작품: 닭은 이외로 위대하다"
* 우수상: 무제(無題), "작품: 요나단의 목소리"
* 신인상: 조각난 인간을 향한 응시와 그 개인화 ― 연상호의 만화 『계시록』 읽기, "작품: 계시록"
* 신인상: <웹툰 약한영웅 평론> 경계 너머의 소년들, "작품: 약한영웅"
신인상: 조각난 인간을 향한 응시와 그 개인화 ― 연상호의 만화 『계시록』 읽기
[ 연상호, 최규석 작가의 <계시록> ]
1. 지옥의 탄생
연상호의 세계는 지옥이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적 치장이 아니다. 말 그대로 지옥이다. 그가 만든 냉혈한 세상 속에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거나 갈가리 찢어진 몸을 이끌고 피와 눈물을 흘리는 인물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비명과 신음은 아침에 들리는 새소리처럼 자연스럽다. 연상호의 그런 지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아수라장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은 듯하다.
그런데 연상호의 지옥이 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폐허의 반영이라면 어떨까? 연상호의 만화 『계시록』(최규석 그림, 문학동네, 2023)(1)(2)의 앞뒤를 장식한 폐허 그림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 그림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우리네 현실을 대변하면서 갈가리 찢어진 신의 언어가 그 초라한 현실 안에 편재(遍在/片在)하고 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허름한 폐허에서 자신의 발에 차이는 돌멩이는 흙먼지들의 덩어리에 불과한가 혹은 우주로부터 자신에게로 도달해서 인간 실존의 무의미를 보여주고 구토하게 만드는 신의 뜻인가? 이런 질문에 빠지는 순간, 끊임없이 휘청거리게 된다.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이 흔들림에 연상호적 지옥의 위력이 있다.
연상호의 만화가 지옥인 이유는 유혈이 낭자하는 폭력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을 어떤 ‘시험’에 들게 한다. 그 시험에 명확한 답이란 없다. 이 점이 중요하다. 답이 없는 극한에 내몰린 자들의 고뇌와 몸부림을 쭉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위치한 시공간에서 어느샌가 자신이 똑같은 질문을 앓고 있음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을 적잖은 독자들이 경험했으리라고 예상한다. 그 불쾌하면서 묵직한 경험도 고통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지옥이 아닐까? 연상호의 『계시록』이 뛰어난 지점은 지옥도를 독자들에게 관람시키는 수준을 넘어선다는 데에 있다. 『계시록』은 그 지옥 속 수인인 인물들에게 어떤 난제를 부여하고 겪게 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들이 인간과 종교의 복합성에 관한 자신만의 ‘지옥’을 스스로 생성하고 통감하도록 유도한다. 그 난제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몰입감이 뛰어나다. 그 과정의 중심에는 종교에 못 박힌 수수께끼들이 피 흘리고 있다.
종교는 인간의 본질, 선악의 판단, 신의 존재 등과 같은 심오한 문제들을 포괄한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등 각 종교는 각자 다른 방식의 설명을 제시한다. 이들 종교가 상호 존중의 자세를 잃고 자기만이 절대자의 왕좌에 앉으려 할 때, 온갖 분란이 발생하는 경우를 목격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신의 이름을 내걸고 범해지는 각종 만행과 범죄는 그 예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선의 실천을 강조하는 종교와 그 종교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신도의 악행, 이 둘은 서로에 대해 모순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이 질문에 관해 연상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영화 <사이비>(한국, 2013)와 만화 『지옥1~2』(최규석 그림, 문학동네, 2020)에서 심도 있게 다룬 바 있다. 앞의 두 작품과는 사뭇 다른 고민과 답변이 『계시록』에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화의 제목처럼 만화 속 두 중심인물인 성민찬과 이연희는 동일하면서도 상이한 방식으로 계시를 받는 듯하다.
2. 상대성 우주에서 절대성에 기대는 광인들
『계시록』은 권양래의 여중생 납치 감금 범죄에 대해 종교인 성민찬과 비종교인 이연희가 권양래에 대한 각자의 계시를 받으며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벌하고 정의‘라고 여기는 것’을 실천하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인간과 우주가 내포한 어떤 분열이 선연히 감지된다. 이 분열에 주목하여 읽을 때, 『계시록』에서 펼쳐지는 혼돈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그 혼돈은 대개 한 뿌리로부터 갈라지는 두 가지 사이에서 진동하는 운동으로부터 파생되는 경우가 많다. 이 복잡다단한 수형도를 조금이라도 더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이하에서부터는 『계시록』을 인간관, 윤리관, 우주관의 세 층위에서 각각 읽어보고자 한다.
종교마다 인간을 보는 관점이 조금씩 다르다. 이 만화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개신교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개신교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자 신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이다. 그러나 신의 목적을 실현해야 할 의무를 본래 짊어진 인간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한 후에 신의 명령을 거스른 원죄의 주홍 글씨가 평생 영혼에 아로새겨지게 되었다. 인간은 ‘죄인’이 된 셈이다(3). 이 ‘죄인’이라는 용어가 지닌 두 의미를 연상호는 절묘하게 활용하는 듯하다. 성민찬과 권양래는 죄인의 사전적 의미를 충족시킨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죄인’이 신과의 결합이 끊어져서 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일종의 사회 방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이 종교적 프로토콜로서의 ‘죄인’에도 성민찬과 권양래는 묘하게 해당되는 부분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을 정의하는 종교적 용어에도 다중적인 면이 있듯이, 인간 또한 부분들의 합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인간을 이루는 한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열등하거나, 특정 부분은 아예 결여되어 있기도 하다. 이쯤 되면 인간은 무수한 파편들로 누덕누덕한 거울이지 않을까? 이 비유를 수용할 때, 우주는 인간들이 주변의 상대방들을 무한히 비추면서 자신과 타자 들을 이해하여 가는 만화경으로 빛나게 된다.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95쪽)은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난세에서 완벽한 상태를 동경하는 심리적 경향을 나타내고, 그 경향이 초월적 절대자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일정한 교리 체계와 공동체를 갖추면 종교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종교 형성 원리를 권양래와 성민찬과 이연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변주하는 것처럼 보여서 흥미롭다. 이 셋은 각자의 이유로 미쳐 있다. 권양래는 계부의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고장난 인간”(113쪽)이 되었다. 성민찬은 하나님의 명령에 미친 나머지, “조현형 인격장애가 의심되”(246쪽)는 상태가 되고 만다. 이연희는 자신의 여동생 이윤희의 납치 폭행 사건과 자살에 대한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이윤희의 환각을 본다. 이들 모두 일종의 광인이라 할 수 있다. 고장난 인간은 권양래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광인은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광인의 눈은 달팽이 무늬처럼 돌고 돈다. 상대성과 절대성도 자신의 꼬리를 물고 둥글게 말린 뱀처럼 무한히 돌고 도는 어떤 순환을 형성하는 듯하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주사위 놀이를 즐기는 사탄만이 있는 것인가? 상대성과 절대성이라는 짝패가 던지는 이 질문들이 선순환이든 악순환이든,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갇히게 된 자는 강렬하게 흔들릴 터이다.
『계시록』에서 상극에 위치한 어떤 둘은 서로를 모른 척하지 않는다. 그 양면성은 거세게 공명함으로써 생생한 입체감을 낳는다. 양면적 역설의 기초 단위는 세 인물의 특성에서 먼저 발견된다. 성민찬은 종교적 선의 형태로 범죄를 감행한다. 권양래는 흉악한 범죄자이면서도 계부에게서 학대당했던 유소년기 트라우마로 인해 성민찬으로부터 고문을 당할 때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인다. 이연희는 여성이면서도 보통의 남성처럼 머리카락을 짧게 다듬고 다닌다.
그러나 그 셋이 보이는 광기의 양상은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같”(255쪽)은 본질을 지니고 있다. “사태의 원인을 하나의 대상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255쪽) 그렇다. “권양래는 이 비극의 원인을 괴물이라 하고 성민찬은 신의 명령이라” 하며 이연희는 “자신의 책임이라” 말한다(255쪽). 혼자 미치면 질병이고 다 같이 미치면 종교라는 말도 떠올려 볼 때, 종교와 광증, 종교인과 비종교인, 신과 악마, 선과 악, 의미와 무의미를 가로지르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마치 점선처럼 희미하다는 생각에 닿게 된다. 어쩌면 바로 앞에서 열거된 양자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하게 붙어 있고, 심지어는 동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품게 된다. 욥에게 온갖 재앙과 고난을 주는 신이 오히려 더 괴물 같아 보인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던가? 이와 비슷한 생각을 품게 된 독자들이 한둘이 아니리라고 감히 짐작해 본다.
꼭 종교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절대성을 지닌 상징에 의존하며 살아간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의존성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이, 성민찬과 이연희는 자기 나름의 절대적 기준에 의탁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두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성민찬은 자신의 직감을 신이 자신에게 내려준 '계시'로 여긴다. 반면에 이연희는 사건 해결 과정에서 철저히 자신의 관찰과 직관으로부터 도움을 얻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형사로서의 예리한 감각이 알게 모르게 발휘되는 대목이라 하겠다.
다친 권양래를 휠체어에 싣고서 빼돌리는 성민찬의 행동을 “천사가 데리고 갔”(171쪽)다고 증언하는 한 남성 노인 환자의 말을 한 남자 형사와 이연희가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는 장면이 그 좋은 예이다. 남자 형사는 그 할아버지의 증언을 치매 노인의 평범한 허언이라 여기지만, 이연희는 성직자가 개입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징조를 감지한다. 이연희의 순간 포착 능력이 옳았듯이, 치매 할아버지의 목격담은 그저 광인의 한낱 헛소리로 치부될 수 없다. 그 말씀은 혼란이 이 세계에 부여하는 입체감의 한 표징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3. 선악의 차안(此岸/差顔)
인물 성격의 층위에서부터 존재하는 이러한 이원성은 그 자체로 2차원의 단순한 대립 상태에 머물지 않고 윤리적 숙고의 3차원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애초에 이항 대립 구조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의문이 섣부른 오판이 아니라 합리적 의심이라 여겨질 수 있을 만큼, 흑이나 백, 둘 중의 하나로 딱 편입되기 힘든 제3의 점이지대가 현실에 실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민찬은 신의 언어를 전달하는 사자이다. 그런 사자가 악인을 살해하려 시도하고 폭행한다면, 또 그 폭력을 “하나님이 시켜서”(171쪽) 감행했다면, 그 사자는 “천사님”(170쪽)인가 혹은 또 다른 악마인가? 권양래는 가엾은 정신질환자로 동정을 받아야 하는가 또는 사악한 마귀로 손가락질을 당해야 하는가? 만약 사탄이라면 그 사탄은 신에게 또 다른 어린 양인가 또는 위험한 적인가? 신이 그 사탄을 용서하고 보호해준다면, 신은 제한 없는 사랑을 실천한 것인가, 아니면 사탄의 동지로 타락해버린 것인가? 앞에서 열거한 질문들처럼 대립적 이항은 단순한 구조를 세우는 데에 멈추지 않고 새로운 곁사슬 질문들을 낳아 가면서 사고의 입체적 확장을 불러일으킨다.
권양래를 둘러싼 질문들을 더 깊숙하게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사실, 『계시록』의 거의 모든 질문들이 권양래와 얽히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권양래는 문제적이다. 권양래는 문제이다, 라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그는 그 자체로 우리 앞에 던져진 하나의 문제이다.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뭉쳐졌기에, 저리도 추악한 몸뚱어리가 되어버렸을까? 차근차근 확인하고 헤매 보자.
권양래를 악으로 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거의 없을 듯하다. 실정법적으로나 보편적 윤리의 감성으로나 죄악에 해당하는 행동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날 때부터 악마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낙성의 소견을 중요하게 참고한다면, 그는 계부의 학대와 친모의 외면을 당하고 나서 악마로 ‘다시’ 태어났다. 태초에 죄악이 있었던 셈이다.
이 지점에서 첫 번째 질문이 제기된다. 유소년기의 불우한 사정이 범행의 면죄부가 될 수 있는가. 사실, 이 질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회학, 범죄심리학, 아동청소년학 등의 분야에서 논란이 되어 왔다. 이 논란에서 크게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범행의 최종 실행 주체는 결국 그 범인이기 때문에 책임을 면제해줄 수는 없다는 주장과 책임을 완벽히 면제해줄 수는 없지만 범인의 마음속 상처에 대한 사회의 책임도 중요하게 참작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두 주장 모두에 나름의 일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여전히 논란거리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리라. 이낙성 교수는 후자 쪽으로 기울었던 듯하지만, 어두운 과거에 대한 상처를 흉폭하게 표출한 책임은 당사자의 영혼에 영원히 묻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낙성의 법정 진술이 일으킨 파급력이 상당하다. 수많은 누리꾼들이 권양래의 불미스러운 가정사에 눈길을 두는 동정 여론이 일기 시작하자, 권양래의 모진 고문에서도 살아남은 이윤희는 그 동정 여론으로부터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느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한 흉악 범죄자의 남모를 아픔에 반응하고자 한 많은 이들의 선한 의도가 흉악 범죄 피해자의 자살을 부추긴 악한 결과를 분만한 격이다. 이러한 부조리극 앞에서 선은 악의 또 다른 얼굴이고 악은 선의 또 다른 얼굴일 수 있다는 절망과 전율마저 느끼게 된다. 이윤희도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끝맺기 전에 이런 절망과 전율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악마여야 했”(283쪽)던 이에게 면책과 용서의 여지를 조금이라도 부여하는 것이 새로운 악으로 작용한다면, 그 악마를 영영 제거하는 것이 선일까? 이 두 번째 질문은 다친 권양래를 몰래 납치하는 성민찬을 목격한 노인의 증언에서 시작하였다. 비록 스쳐 지나가는 듯이 가볍게 배치된 장면이지만, 앞에서부터 재차 언급하듯이, 이 장면은 악에 대한 사적 징벌이 천사의 선행이 될 수 있는지를 오래도록 곱씹게 만든다. 노인의 증언이 묵중하게 침전한 마음은 오로지 한 사람의 것에만 그치는 것일까?
실정법이 제대로 징계하지 못한 악인에게 개인적으로 해를 가하는 행동에 대해 역시 의견들이 여럿 갈리고 있다. 그 의견들의 맥락은 크게 둘로 나뉘는 것 같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거론하며 응당한 대처라고 통쾌하게 느끼는 이들도 있는 반면에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도 그 목적에 못지않게 정당하고 선해야 한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보편적 감정의 직접적 호소를 중시할 것인지와 이성적 사유의 냉철한 판단을 존중할 것인지 사이의 싸움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작가는 “천사님”(170쪽)이라는 표현을 통해 성민찬이 이연희에게 그런 천사가 될 수도 있겠다는 관점을 제시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바로 앞 문단에서 정리한 두 입장이 각각 내세우는 설득력과 논리가 나름 강해서, 그런 부분이 많은 이들을 망설이게 만들 것이다. 그런 망설임도 종교의 교리에 의해 굉장히 줄어드는 경향이 만화에서 나타난다. 악인을 처벌하는 것이 합당하는 내용이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바(4), 신의 명령을 따른다는 의식이 망설임과 죄책감을 대폭 줄여줄 수 있다. 신이 명하는 선을 악의 도움을 받아 실천하는 이 아이러니 앞에서 성민찬의 범행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확실한 점은 그의 범행에 악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가 성경의 내용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전체에 대한 통찰을 놓친 것으로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특정 구절을 해당 맥락 및 성경 전체와의 조화 속에서 읽지 못하고 그 구절을 개별적으로 분리해서 이해하고 실천했기 때문에 부적절한 악행으로 타락해 버린 것이다(5). 성경에서는 악에 대한 징벌과 약자를 향한 사랑이 강조된다. 성민찬의 작중 행동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노라면, 그는 그런 사랑이 모든 행동의 방향을 결정해 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생각은 사랑의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순진한 맹목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허점이 많다. 아무리 사랑과 같은 긍정적 가치도 인간 세계에서 통용되는 외적 도덕 기준을 무시한다면 공허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달고 악이 감행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한 타락 자체가 성경 안팎의 세계를 전체적으로 관조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4. 고함과 분노가 메아리치는 나락에서
성민찬의 범죄 행각은 밤의 폐건물에서 권양래와 이연희를 결박하고 살해하려 하는 장면에서 극악에 달한다. 이 장면은 만화의 세 중심인물이 처음으로 같은 곳에 결집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장면까지 이르고 나면, 성민찬은 신의 뜻을 대신 실현하려는 의도가 강하다기보다는 새로 지어질 대형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어서 막대한 이익을 취득하려는 탐욕에 눈이 먼 것처럼 보인다. 그의 행동을 이제 더 이상 신의 대행으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저 계획적 범행일 뿐이다.
그 음험한 도살장에서 이연희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권양래는 동생 이윤희의 원수이다. 그에게 복수해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러나 그는 유괴되고 납치된 신아영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자이다. 형사로서 피해자 신아영을 구해야 한다. 개인적 원한인가 선공후사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이 문제 안에서 뭇 독자들이 이연희와 함께, 이연희가 되어서 갈팡질팡하게 될 것이고, 그러했을 것이다. 이연희에게 “저놈은 악마야… 악마의 편에 서지 마…”(212쪽)라고 말하는, 아니 그렇게 들리는 이윤희의 환청이 그 극심한 내적 갈등의 징표이다. 이연희가 이윤희의 언니임을 알아챈 권양래의 거래 앞에서 그러한 갈등의 진폭은 더 증폭된다. 권양래의 목숨이 전적으로 이연희의 방아쇠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그 황폐한 공간은 생과 사의 기로에 선 절벽이자 나락으로 탈바꿈한다. 그야말로 끝장이다.
연상호는 이 끝장을 더 끝장으로 밀어붙인다. 성민찬은 살인의 죄를 권양래와 이연희에게 뒤집어씌우려 한다. 그녀는 신아영의 목숨을 이유로 성민찬에게 자수할 것을 권하며 권양래를 살리라고 절박하게 소리친다. 그때, 성민찬은 결정적인 말을 외친다. “개소리 하지 마!! 당신은 지금 악마의 편을 들고 있는 거야!”(221쪽) 이 고함은 이연희 자신의 과거로부터 거슬러온 피맺힌 메아리로 들을 만하다. 그녀 자신도 권양래를 악마가 아닌 고장난 인간이라 묘사했던 이낙성 교수에게 “개소리 하지 마! 저 새끼는 악마야! 악마에게 이유를 주지 마!!”(111쪽)라고 고함치지 않았던가. 거울처럼 자신에게로 되울려 오는 그 말은 만화책의 종이를 뚫고 독자들의 마음속으로도 파고드는 위력을 발휘한다. 자신이 비난했던 사람이나 입장의 위치에 막상 자신이 서게 된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마땅한가? 이런 질문이 분노처럼 메아리치게 된다.
이쯤만 되어도 절정인데, 연상호는 이 절정을 아예 초절정으로 끌어올린다. 권양래와 이연희의 난투극을 연출하려 했던 성민찬의 계획이 이연희의 극적인 반격 때문에 실패하고 나서 의자에 꽁꽁 묶인 권양래의 목숨은 전적으로 이연희의 손끝에 달리게 된다. 이 순간, 앞에서 언급한, 절벽과 나락의 비유는 더 이상 비유가 아니게 된다. 정말 그 아랫바닥에 닿으면 죽음과 어둠만이 펼쳐지는 절벽과 나락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상호는 그 절벽과 나락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밀어 넣는다. 잔혹할 정도로 파괴적으로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내몰려서 절박해진 심정의 대리적 체험 또는 공감으로 인해 일종의 창조성이 샘솟는다. 독자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손을 놓았을지 혹은 놓지 않았을지에 관한 고심이 생성되게 하는 효과가 생겨나는 것이다.
종합하여 정리하면, 셋이 핏덩어리 져서 얽히고설키는 폐건물 장면은 단순한 격투로 보고 지나치기에는 매우 아까운 장면이다.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의 복잡함, 공적 정의와 사적 사연 사이의 치열한 대립,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막중한 책임, 독자들을 극한까지 몰고 가는 작가의 지적 과감성과 과감한 지성, 이 모든 것들이 처절하고도 사실적인 감정 속에서 얽히고설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핏덩어리 진 사투 속에서 권양래는 추락사하기 직전에 신아영을 “외눈박이가 잡아먹었”(232쪽)다는 알 수 없는 실마리를 이연희에게 던져준다.
5. 카오스인가 코스모스인가
권양래가 남긴 마지막 힌트인 외눈박이의 의미에 대해 이연희는 심각하게 숙고한다. 도저히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을 것 같던 찰나에 이연희는 자신의 건축업자 아버지로부터 그 외눈박이가 외눈박이 창일지도 모른다는 계시를 직감적으로 받게 된다. 결국, 이연희의 직감이 옳았고, 건물 철거 현장에서 극적으로 신아영을 구조하는 데에 성공한다. 자신이 갇힌 건물이 붕괴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구조된 신아영은 이연희에게 현실적으로든 영적으로든 구원이 된다. 형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 생각했어요… 누군가… 꼭 올 거라고… 저 문을 열고 누군가 꼭…”(277쪽)이라고 말하는 신아영의 진실한 고백은 그토록 언니 이연희를 기다리던 이윤희의 심정과 겹쳐 들리기 때문이다. 신아영의 이 말을 통해 이연희의 환각과 죄책감이 많이 해소되지 않았을까? 신아영을 되찾은 후에 외눈박이 창의 너머로 보이는 창천은 자책으로 얼룩져 왔던 이연희의 마음이 어느 정도 정화되었다는 암시를 주는 상징처럼 보인다. 거대한 키클롭스와도 같이 굳게 버티고 서서 극복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외눈박이’ 수수께끼를 통해 우주의 두 얼굴에 관한 계시가 내려오는 듯하다. 이 계시 또한 화면 분할로 인해 십자가처럼 보이는 외눈박이 창 건너편으로부터 내려온 것일까?
궁극적으로 『계시록』은 고난에 대한 이야기라고 과감하게 단순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세 중심인물에게는 각자의 고난이 주어지고, 그들이 각자의 고난을 어떻게든 풀어 가려고 발버둥 치기 때문이다. 이 만화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어떤 고난이 닥쳐왔을 때, 그 누구라도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이 고난의 의미는 무엇이고, 의미가 있다면 누구의 의도이며, 그 누군가는 신인가 악마인가?" 이렇게도 질문(단언)해 볼 수 있다. "이 고난은 무의미한 우연이지 않을까?" 바로 앞의 질문에서 무의미를 일종의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면,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사실상 하나가 된다. 이 미묘한 상동성을 『계시록』에서 같이 감지해 보기로 한다.
성민찬이 담임 목사를 맡는 사명의 나라 교회에 권양래가 처음 들어왔을 때, 둘의 반응이 극명하게 나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권양래는 교회에 “그냥… 지나가다 들렀다”(14쪽)고 말하지만, 성민찬은 “그런 게 다 주님의 인도하심”(15쪽)이라고 응수한다. 이때, 성민찬의 상의는 백색인 반면에 권양래의 상의는 흑색에 가까운 우중충한 색깔인 것이 눈에 띈다. 이러한 이미지 연출은 신의 명확한 의도를 찾아서 혼탁한 세상을 표백하려는 자와 혼란한 세상의 어둠을 그대로 수용하려는 자 사이의 극명한 단절을 표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권양래를 신이 보내주신 선물이라고 여기며 내심 기뻐하던 성민찬에게는 곧바로 시련이 찾아온다. 아내의 외도 증거 사진이 당도하기 때문이다. 코스모스를 믿는 자에게 아내의 간음은 마른하늘로부터 날벼락처럼 덮친 고난이다. 그는 그 고난마저도 신이 자신에게 주는 시련으로 여긴다. 이러한 태도가 조금 과도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꼭 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누구나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관성은 존재한다.
『계시록』의 또 하나 빼어난 지점은 메마른 대지를 영적 세계로 인식하거나 전환하는 인간의 종교성을 연출하는 감각에서 발견된다. 성민찬이 계시를 받는 장면들의 이미지 연출이 특히 그렇다. 성민찬이 계시를 얻는 장면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자연현상이 기독교적 이미지와 겹쳐져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 예를 하나 들면, 성민찬이 오랜만에 들른 요양 병원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권양래와 재회하고 나서 바람에 휘날리는 흰 커튼에서 성모 또는 성령의 이미지를 보는(혹은 읽어내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은 종교적 계시를 받거나 신의 음성을 듣는 인간의 영적 체험이 실은 자연의 무의미한 이미지를 인면(人面)으로 인식하는 과학적 현상에 불과하다는 계시를 재차 내려주는 것처럼 보여서 의미심장하다. 이 계시를 수용한다면, 창조론마저 인간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한 기독교 나름의 과학적 노력이 구축한 산물로 볼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초기 조건의 미세한 변화가 결과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뒤바꿀 수 있다는 과학적 설명에는 일종의 카오스모스가 내재한다. 나비가 날갯짓하는 과정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인과들을 신의 영속적인 창조 과정으로 본다면 코스모스라 명명될 것이고, 그 인과들의 무한성을 예측 불가능성의 원흉으로 본다면 카오스라 명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적 언어의 흩어진 조각들에서 일관된 의미를 인간들이 힘겹게 추출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의 무목적적인 흐름을 모자란 인간으로서 전부 파악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이 글의 마지막 질문이다. 이 마지막 질문은 이연희가 수감된 성민찬에게 계시를 내려준 존재가 “신이었다고 확신하세요?”(285쪽)라고 묻는 맥락과 상통한다.
6. 지옥의 개체적 탄생과 그 변이의 은총
이 마지막 질문은 카오스모스에 대한 응시를 인간이라는 소우주로 되돌아오게끔 추동한다. 카오스모스를 엔트로피로 놓아둘 것인지 또는 네그엔트로피로 정렬시킬 것인지를 결정하는 몫은 결국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연상호는 만화가 진행되는 내내 질문들을 던질 뿐, 그것들에 대한 답은 일절 남기지 않는다. 그저 응시할 뿐이다. 바로 이 점이 전작 『지옥1~2』과 결정적으로 변별되는 지점이다. 『지옥1~2』에서는 인간에게 심판을 선고하는 신령과 인간을 살해하는 괴물들 같은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하는 가운데 새진리회를 중심으로 사회 전체에 거대한 혼란과 파란이 요동친다. 그 격렬한 동요 끝에 “사람 죽는 걸 봤으면 살릴 생각부터 해야 사람이잖아요(6).”라고 말하는 택시 기사의 전언을 통해 작가가 어느 정도 자신의 답안지를 제출한 듯한 느낌이 있었다. 반면에 이번 신작 『계시록』에서는 그 어떠한 영적 존재의 도입 없이 세 인간의 맞물리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그 어지러운 관계가 품은 많은 질문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자세가 냉철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 질문들은 그대로 독자들의 내면으로 삽입되는 효과를 발휘한다. 독자들은 쉽사리 그 답이 주어지지 않는 질문들을 자신들의 뇌리 속에서 통째로 앓는다. 그 어마어마한 아픔은 종교와 선악을 분절시키는 인간의 분열상에 관한 사유를 독자들이 개별적으로 생성하도록 촉진한다. 그 촉진제에 의해 각자의 ‘지옥’이 유도 분만된다. 그렇게 지옥은 재탄생한다. 이연희와의 면회 후 감방으로 되돌아온 성민찬의 모습은 독자들이 이 만화를 읽는 동안 취하게 될 한 포즈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여서 처연하다. 감옥의 벽지에 나타난 무수한 악마 이미지들을 어떻게든 지우려는 성민찬은 만화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 모든 것들을 매장하는 암흑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처음부터 흑암만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침묵과 울림이 모종의 상호 공명 관계를 맺어 가는 세계가 담긴 만화를 읽는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들 스스로 답을 구해낼 수밖에 없다. 만화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비로소 만화가 남긴 질문들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칠 것이다. 그러나 메아리치는 것은 그것들뿐만이 아니다.
만화 속에서 신의 응답을 갈구하는 적잖은 인물들의 아우성이 울려 퍼진다. 그들은 하나같이 절대자에게 의존하는 양상을 띤다. 구복 신앙의 한 변이된 양태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어쩌면 성직자들과 신자들 중의 일부가 종교의 교리와 윤리를 현실에 맞게 적절히 실천하는 작업보다 자신의 안위를 비는 데에만 집착하게 된 변질의 원인으로 지목될 수도 있다. 현실 감각을 상실한 맹목적 신앙이 이 만화와 더불어 현실에서도 생명 보호의 신적 사랑이 아닌 파괴의 폭력적 비극을 초래하는 무서운 씨앗임을 연상호는 보여주려 했던 것 아닐까?
연상호는 만화 예술이 무의미한 잉여로 오인되는 세태 속에서 『계시록』을 통해 만화가 재미와 철학을 건실하게 겸비할 수 있는 미학적 성취물임을 여실히 증명한다. 일방적으로 계시가 내려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의 『계시록』을 펼쳐 읽어보시기를! 그리하면 연상호라는 궁금증 많은 한 인간, 한 잔혹한 조물주, 한 짓궂은 악마로부터 흘러온 불길하고도 신비로운 계시를 당신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면 끊임없이 타오르는 혼돈의 불길 속에서 자신들의 내면에 잠재한 또 다른 자신들과 아웅다웅 다투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사투를 벌이다 보면, 그 지옥은 고통을 겪는 고문실을 넘어 지성을 절차탁마하는 훈련장으로 승화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은 연상호와 최규석이 사력을 다하여 지옥으로부터 빚어낸 연옥이다. 그 연옥을 통과함으로써, 보다 현명한 계시를 스스로 찾아가는 은총이 깃들 수 있으리로다.
(1) 이하 이 글에서 특별한 표시가 없는 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 것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2) 이 글에서는 단행본을 ‘『 』’로, 영화 한 편을 ‘< >’로 표기하였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언도된 십자가형을 통하여 온 인류의 죄를 대속했을 때, 인류가 간접적으로나마 죄를 씻게 되었지만 말이다.
(4)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 24:7)
(5) 찰스 킴볼, 『종교가 사악해질 때』, 김승욱 옮김, 현암사, 2020, 103~109쪽 참고.
(6) 연상호 글, 최규석 그림, 『지옥2』, 문학동네, 2020, 290쪽.
< 2023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
* 대상: 불행의 가능성에 대한 노트 - 「집이 없어」론, "작품: 집이 없어"
* 최우수상: 학원 액션물에 대한 또다른 시선 ONE, "작품: ONE"
* 우수상: 작품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적 약자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 "작품: 닭은 이외로 위대하다"
* 우수상: 무제(無題), "작품: 요나단의 목소리"
* 신인상: 조각난 인간을 향한 응시와 그 개인화 ― 연상호의 만화 『계시록』 읽기, "작품: 계시록"
* 신인상: <웹툰 약한영웅 평론> 경계 너머의 소년들, "작품: 약한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