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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無題)

2023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우수상, <요나단의 목소리>

2023-11-13 문종필

< 2023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

* 대상: 불행의 가능성에 대한 노트 - 「집이 없어」론, "작품: 집이 없어" 

* 최우수상: 학원 액션물에 대한 또다른 시선 ONE, "작품: ONE"  

* 우수상: 작품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적 약자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 "작품: 닭은 이외로 위대하다"  

* 우수상: 무제(無題), "작품: 요나단의 목소리"

* 신인상: 조각난 인간을 향한 응시와 그 개인화 ― 연상호의 만화 『계시록』 읽기, "작품: 계시록" 

* 신인상: <웹툰 약한영웅 평론> 경계 너머의 소년들, "작품: 약한영웅"



우수상: 무제(無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복은 22장 37절에서 39절.)



stin****

역겹다. 개소리 그만들 하고 하게 되어있는 것들을 해라. 


floc****

제발 이런 거 혼자만의 취향으로 간직하세요. 생물학적으로 성별은 두 개입니다. 논 바이너리 따위 메타버스에서 가서 맘껏 하세요. 


333v***

그 식물의 씨앗을 디자인하고 계획하신 분이 인간도 그분 모습을 따라 만드시고 동성애 하지 말라고 하심. 그 몸에 대가를 치른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에이즈, 원숭이 두창 엠 폭스 걸림. (1)


1. 비평의 쓸모 

최근에 어느 한 매체에서 마이아 코베이브(Maia Kobabe)의 첫 책 『젠더퀴어』(2023)를 리뷰한 적이 있다. 이 책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논바이러니’라는 성적지향성을 지닌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로 작가이자 화자인 당사자가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긴 여정을 고백의 형식으로 담아놓았다. 유년 시절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담담한 고백의 형식으로 채워 놓고 있으니 매력적이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가득한 국내의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소개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되었다. 개인적으로도 우리 사회가 조금은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론가로서 만화 텍스트를 통해 사회적 실천을 적극적으로 감행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특정 매체에 15매 정도의 짧은 리뷰를 쓰게 된 것이다. 나의 짧은 서평으로 한두 명의 독자들이 책을 구입해 읽고, 그 독자들이 또다시 추천 과정을 거쳐 긍정적인 나비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은 것이다. 그런데 댓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2023년에 이런 댓글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허무했다. 최근에 읽은 〈퀴어축제방해잔혹사(2)〉라는 칼럼 시리즈를 통해 면역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안타까웠다. 

『젠더퀴어』에 대한 짧은 리뷰에 대한 댓글은 가관이 아니었다. 역겹다는 표현부터 개소리라는 말까지 입에 담을 수 없는 언어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성소수자들을 괴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질병을 가진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힘겹게 투쟁했음에도, 어린 시절 과학책에서 읽었던 인공지능(AI)과 전기차가 이제는 너무나 흔한 최첨단의 포스트휴먼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편견과 혐오는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달린 악플 개수는 적었지만 이런 악플을 읽어 내려가면서 허무한 감정을 짓누르며 씁쓸한 감정을 숨겨야 했다. 비평은 동시대에 좋은 텍스트를 생산해내는 작가들과 함께 호흡하는 과정속에서 조금은 더 즐겁고 더 나은 쓸모를 위해 애쓰는 장르라고 믿었는데, 이런 댓글 앞에 무기력하게 쓰러진 것이다. 무엇보다도 댓글을 적은 사람들은 이 텍스트를 읽지도 않고 이런 혐오 발언을 내뱉었다. 한 번이라도 읽어보고 이런 언어를 뱉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그럴 여유와 마음이 넉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사회가 정해놓은 통념과 신념에서 벗어난 존재들은 오랜 시간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믿음’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이 싸움은 소수가 다수를 설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만만치 않았다. 모두가 ‘네’라고 말하는 분위기 속에서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하지만 진보적인 역사와 당대의 예술작품이 이런 모순적인 순간을 적나라하게 기록한다. 그러니 소수자들은 어떤 방식이든지 피 흘릴 각오를 해야 했다. 이 과정은 혁명을 쟁취하는 것과 흡사해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처절한 싸움의 기록을 한 명의 만화가가 진솔하고 담담한 태도로 용기 있게 고백하고 있는데, 일부의 독자들은 이런 결과물을 읽어 보지도 않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습관처럼 『젠더 퀴어』 리뷰에 배설물을 토해낸 것이다. 그래서 한 명의 비평가로서 이런 댓글 앞에 당당히 맞서 비평의 역할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모든 평가와 잣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잣대는 천년을 사는 은행나무처럼 견고한 생명을 지닐 수 없다. 은행나무가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겪는 과정에서 잎 모양과 크기를 바꾸는 것처럼, 비평의 기준도 계절처럼 변하고 변주한다. 동시대에 발맞추어 격동적으로 만화의 표정도 변하고 있으니 비평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편견과 혐오가 넘치는 동시대에 비평의 역할은 조금은 더 친절한 언어로 독자들이 오해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현상 또는 개념에 대해 조금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차분히 설득하는 과정이겠다. 이 글은 2023년 삶의 현장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동시대의 가장 주목받고 있는 퀴어 만화를 중심으로 ‘편견’에 맞서 싸워 보려고 한다. 이 지면에서는 정해나의 『요나단의 목소리(3)』(2022)을 중심으로 앨리슨 벡델의 『펀홈』(2017)과 마이아 코베이브의 『젠더퀴어』(2023)의 도움을 받아 이 작업을 수행해 보고자 한다.


2. 진정한 신념과 어긋난 신념 

신념은 굳게 믿는 마음이다. 마음은 평범한 것일 수 있으나 ‘굳게’ 믿게 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고 잘못된 것을 올곧게 수정한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톰 행크스 주연의 〈포레스트 검프〉(1994) 주인공 포레스트처럼 불편한 몸과 낮은 지적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소소한 것을 이행함으로써 편견을 극복해 나간다. 이처럼 믿음은 한 개인을 힘 있게 만든다. 하지만 이 믿음이 자칫 어긋나거나 동시대의 흐름에 벗어난다면 골치 아픈 상태로 머물게 된다. 이런 빗나간 믿음의 형태들을 쳐다보고 있으면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것을 넘어 사죄를 구해야 할 때도 많다. 굳이 길고 긴 터널의 인류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한국현대사에서 빈번히 발생했던 혐오와 학살의 순간은 어긋난 신념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믿음은 각자의 방식으로 왜곡되고 굴절된다. 하지만 문제적인 것은 동시대에도 이러한 순간이 여전히 빈번히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다뤄지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잘못된 믿음도 이에 해당된다.  

 최근에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서 古 육우당 시인의 추모집 개정판이 지난 6월에 간행되었다. 육우당은 청소년 성소수자로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느꼈던 고뇌와 좌절과 분노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의 소재를 산문과 시로 표현했다. 개정판에서는 죽음과 근접해 있는 산문을 배제하고 시 텍스트만을 선별해 간행되었지만, 독자는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한 명의 어린 존재가 겪어야 했던 슬픔에 공감하기는 어렵지 않다. 2023년 개정판에서 육우당의 산문이 배제된 이유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세상을 향해 죽음으로 응답한 그의 삶이 어린 성소수자들에게 감염될 수 있다는 발행자 측의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행성인 운영위원장 지오의 말처럼 “20여년의 시간동안 우리 공동체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4)” 초판에서 읽을 수 있는 죽음의 발걸음을 잠시 누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죽음도 감기처럼 감염되기 때문에 육우당과 같은 처지에 놓인 성소수자들에게 죽음의 방식이 아니더라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소수자들에게 죽음은 낯선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죽음은 나이 듦과 같은 한계에 직면한 상태에서 작동되는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성소수자들에겐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실존적인 감정과 맞닿아 있다. 

실제로 군대 휴가 중 성정환 수술과 성별 정정 절차를 받은 변희수 하사는 여군으로 근무하기를 바랐었지만, 남성 성기 상실을 심신장애로 판정해 군은 그를 강제 전역시켰다. 그는 이후 목숨을 끊게 된다. 이 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2021년이다. 2023년에 들꽃영화상을 받은 이일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I am More)에서 등장하는 인물 모지민은 자신의 삶을 “지긋지긋한 욕창 같은 삶(5)”이라고 고백한다. 자유로운 영혼을 육성하는 예술대학에 입학했지만 여성성을 지녔다는 이유로 선배에게 뺨을 맞았다. 군대에서 커밍아웃을 하자 성주체성 장애라는 별명으로 정신병원에 한 달간 입원하게 된다. 그는 이후로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자신에게 조금은 자유로웠던 공간인 이태원으로 숨는다. 대체 이들은 어떤 벽에 부딪쳤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삶을 살아야 했을까. 적어도 희생의 방식은 아니어야 했는데, 자신의 삶을 불꽃처럼 소진해서 얻어야 했던 의미는 정말로 가치 있었을까. 가장 소중한 생을 세상에 헐값으로 헌납해야만 자신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면 무엇인가 굉장히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사회임에는 틀림없다. 이들은 무슨 이유로 “사랑해요/ 이 한마디(6)” 조차 힘들어하고 주변으로부터 놀림을 받는 것일까. 이들은 말한다. “이반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이반이 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라고 말이다. 

그렇다. 성적지향성과 성적정체성은 주어진 것이다. 이들은 “뱃속에서 던져 나왔을 때부터(7)” 이반이 된 것이다. 그러니 배제하거나 외면할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이든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이들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사회적 약자와 나를 보호하는 것이고, 궁극에는 우리를 보호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고 육우당, 고 변희수, 모지민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39절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슴에 품었던 자들이다. ‘사랑’의 정의는 무한하지만 예수가 사랑했던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었던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런 신의 계시를 인간들은 동일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사랑’을 이해하고 느낀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지만 이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을 그대로 놔둘 수 없는 것도 인간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지금 보다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혐오와 편견에 맞서 사회를 조금씩 바꾸어 왔다. 물론, 100년 후에 인간이 지금 우리가 옳다고 믿는 신념과 사고를 모두 옹호하지는 않겠지만, 부조리한 현상이나 거짓된 진실에 맞서 살아가는 것도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만화계에서 유의미한 작품이 출현했다. 

딜리헙(DillyHub)에서 2018년 7월부터 2021년 6월까지 3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연재를 성공적으로 마친 정해나 작가의 『요나단의 목소리』가 그것이다. 이 결과물은 펀딩에 성공한 이후, 입소문을 타며 많은 독자에게 공감을 이끌어 냈다. 다루기 힘든 편견을 섬세한 시선으로 독자를 치유해 주었다. 5회 무지개 책갈피 퀴어 문학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2023년 신인만화상을 수상했으니 안과 밖 모두 작품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작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적인 기표보다는 이 만화가 품고 있는 키워드가 워낙 매력적이어서 호명하지 않을 수 없다. 나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과 평론가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우선, 이 만화는 개신교 미션스쿨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기독교 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성장만화로 선우, 의영, 다윗, 주영 네 인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정’과 ‘동성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앞서 여러 배경을 설명했듯이, 우리 사회에서는 생물학적인 여성과 남성만을 인정하고 있으니 남성이지만 여성인 성적지향성(성정체성)을 가질 수 있고, 여성이지만 남성인 성적지향성(성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존재들은 공동체에서 철저히 외면당한다. 그러니 여성도 남성도 아닌 ‘논바이러니’와 같은 존재 역시 받아들여질 리 없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감추며 어둡고 컴컴한 구석에 오랜 시간 몸을 숨겨야 했다. 

정해나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선우는 그런 인물이다. 선우는 매우 공부를 잘할 뿐만 아니라 성품도 곧고 착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학생이다. 대한민국 고등학교는 인성을 가르치기보다는 오로지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선우가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나무랄 때 없는 모범생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게다가 노래를 탁월하게 잘 불러 미션스쿨 선가대의 독보적인 존재이기도 하니 거의 완벽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인물에게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한다. 여기서 결함은 ‘결함’ 자체라기보다는 기독교의 세계관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동성애자리는 사실이다. 물론, 보수적인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지만, 성경이 사후적으로 구성된 역사적인 텍스트라는 입장에서는 ‘오독(9)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요나단의 목소리』에서는 이런 증거를 여러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할 뿐, 전체적인 세계관은 동성애는 ‘죄’ 일 수밖에 없다는 설정을 짊어지며 오염된 신념과 싸운다. 그러니 이 텍스트는 시작할 때부터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동성애는 ‘죄’ 일 수밖에 없다는 보수적인 ‘기독교’와 맞서 싸운 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직접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섬세한 감정을 만화적인 형식으로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는 정해나의 작품에서 가장 큰 미덕은 곱고 선량한 캐릭터로 비판하기 쉽지 않은 보수적인 기독교 내 동성애 교리를 상냥하게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냥함’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검이다. 무협 만화 속 주인공처럼 어렵게 찾은 무적의 검으로 만화가는 부조리한 것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썰어 낸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무기는 연약하고 위태로운 ‘고백’이라는 특별한 무기다. 그렇다. 이 만화는 ‘고백’의 형식을 무장한 채, 진솔하고 담담하게 성소수자의 입장과 처지를 담아내는 것은 물론, 당사자를 지켜보는 동료들의 사연마저도 고백의 형식으로 처리해, 등장인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개정판에서는 채색을 더해 인물의 시선을 보다 명확하고 명료하게 구분해 독자에게 친절하게 다가가고 있으니, 고백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하는 인물의 표정은 보다 실감 있게 다가온다. 그래서 이 만화는 ‘싸움의 고수’라고도 평가할 수 있겠다. 손자병법에서 가장 위대한 싸움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 텍스트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앞서 서술된 만화의 형식으로 차분하게 당신들의 신념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값지게 다가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연출에 ‘내용’적인 측면 또한 적절히 배합되어 ‘울림’은 배가된다. 차분한 정해나의 만화에서는 극적인 연출이나 자극적인 컷의 분배는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단점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이런 연출로는 ‘고백의 형식’을 잘 담아내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즉, 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형식’을 배면에 숨김으로써 ‘목소리’가 온전히 들릴 수 있도록 연출을 유도한 것이다. 오히려 이 부분이 정해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의도적인 만화적 연출이다. 그래서 이 텍스트의 제목 자체가 ‘요나단의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눈여겨볼 것은 이 만화에서 드러난 만화적 연출보다는 자연스럽게 ‘소재’와 ‘사연’에 집중하게 된다. 만화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만화적 연출 기법이 그림자처럼 뒤로 숨는 방식 자체를 의도적으로 연출한 만화가의 솜씨가 의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만화의 형식은 더욱더 값지게 다가온다. 정해나 작가가 초창기에 딜리헙에서 작업할 당시,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흑백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흑백이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 목소리만을 남기자는 의도이지 않겠는가. 따라서 이 틈에 놓인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요나단의 목소리〉를 깊이 읽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에 대한 것으로 여섯 가지를 들 수 있다. 


2-1. 도서관 

정해나 작가의 작품에는 도서관 장면이 등장한다. 독자들은 갑자기 무슨 이유로 ‘도서관’이라는 단어를 호명하는지에 대해 의아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성소수자들에게 죽은 영혼들이 살아 숨 쉬는 도서관은 매우 특별한 공간이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들어가면 언어로 기록되기 이전부터 동시대에 아우성치는 절박한 사연들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사연이 책이라는 물질의 형태로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러니 어떠한 방해에도 구속되지 않고 조용히 고독하게 그 공간을 거닐며 수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동네 도서관이었다는 어느 한 유명한 과학자의 발언처럼 이런 공간이 성소수자들에게 유의미한 이유는 자신과 동일한 존재를 위험 없이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여전히 보수적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함부로 자신의 존재를 밝힐 수 없다. 그러니 서슴없이 자신과 닮은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는 심리적으로 분위기가 어둡고 컴컴한 도서관이 제격인 것이다. 동시대에는 조금만 노력하면 웹상에서 다양한 커뮤니티를 확인할 수 있지만, 이런 행위조차 조심스럽고 조금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자신과 닮은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도서관에서 읽음으로써 외롭고 높고 쓸쓸한 자신을 달랬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틈에 놓인 배제된 존재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도서관은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공간이 된다.

하지만 『요나단의 목소리』의 배경이 되는 미션스쿨에서는 ‘동성애’를 ‘죄’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런 서적들을 학교 도서관에서 배제한다. 네 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조의영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선우가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퀴어’에 대한 호기심과 선우에 대한 공감을 배우기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찾던 중, 궁금함이 채워지지 않아 도서관에 방문하게 된다. 하지만 ‘퀴어’와 관련된 자료를 학교에서 찾지 못한다. 이것은 지극히 의도적이고 문제적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풍선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나는 단순히 서가가 작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선우는 우리 학교가 미션스쿨이라서 그렇다고 믿었다.”(2:99)라는 의영의 발언은 퀴어 관련 서적이 학교 도서관에 한 권도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니 그렇다. 만약, 미션스쿨에서 야무진 선우가 아닌, 심적으로 연약한 성 소수 당사자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도서관을 들렸을 때, 퀴어 서적이 없었다면 보다 큰 위험과 고독으로부터 방치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정해나 작가가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던 것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만화에서 개별적인 한 인물의 사연은 우리의 이야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추가 설명은 성소수자와 관련된 또 다른 명작 엘리슨 벡댈의 『펀홈』을 통해서 가능할 것 같다. 벡댈의 아버지 역시 성소수자로 그가 살았던 당시의 분위기는 지금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지금은 1년에 한번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게 알리는 합의된 저항인 ‘퀴어문화축제’라도 존재하지만, 벡댈의 아버지가 살던 시대는 이런 목소리조차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숨기는 것이었다. 억압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변형되어 표출된다는 프로이트의 명언을 참조한다면 자신의 욕망을 숨긴 채 살아가는 것은 건강한 삶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구의 몸으로 삶을 끌고 간다. 하지만 표현하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벡댈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감행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동일한 예술가들의 삶을 읽는 것이다. 『펀홈』에서 벡델의 아버지가 프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오스카 와일드의 『진지함의 중요성』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등을 읽은 것은 자신과 동일한 성정체성을 지닌 예술가들을 탐닉함으로써 해방구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벡댈은 “우리 아버지보다도 ‘게이스러운’ 사람이 있다면 마르셀 프르스트가 아닐까(10)”라며 조크를 날리기도 한다. 먼지 묻은 도서관의 책을 뒤지며 “여러 등장인물에 스스로를 대입(11)”함으로써 자유를 갈망한 이들은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있었을까. 그래서 성소수자들이 도서관에서 죽은 영혼들과 호흡하며 책장을 넘기는 모습은 짠하면서도 혁명적인 순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 억압받으며 살아가는 성소수자들의 탈출구이자 해방구가 조용하면서도 음흉한 영혼들이 살아 숨 쉬는 공동묘지인 도서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수 기독교 학교들은 이런 과정 자체를 원천봉쇄한다. 보수 기독교학교 뿐만이 아니다. 마이아 코베이브의 『젠더퀴어』를 읽어보면 “나는 도서관에서 점점 더 많은 퀴어 서적을 찾아 읽었다(12)”라는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도서관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책은 미국의 일부 보수적인 주에서 금기서적으로 낙인찍혀 입고가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나단의 목소리』는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섬세한 감각을 잘 살려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의미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만약, 이 텍스트가 직설적이고 비판적이었다면 보수적인 일부의 독자들은 너무나 손쉽게 외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해나 작가는 퀴어 만화 인지 헷갈릴 정도로 섬세하고 차분하게 독자들을 설득시킨다. 이 부분이 이 텍스트가 지닌 강점 중에 하나다. 


2-2. 권사 

『요나단의 목소리』에서 다윗은 학교에서 잘 놀고 잘 방황하는 인물이다.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머리색을 노란색으로 염색할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자주 싸움하고 다니니 얼굴에 상처와 흉터가 나을 새 없다. 하지만 선우는 그런 다윗을 좋아한다. 조금은 짓궂지만 거짓이 없고 당당한 다윗은 선우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친구이다. 하지만 겉모양이 모범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윗과 선우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 교회 권사님은 다윗을 좋지 않은 친구로 규정한다. 그런데 교회 ‘권사’가 어떤 인물인가. 전도 사업을 맡아보는 기독교의 보직 중에 하나이지 않겠는가. 기독교에 보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처럼 겉모습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은 정해나 작가의 의도적인 연출로 판단된다. 그러니 독자들은 이 씬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에 대해 ‘뭐지’라는 식으로 의아해하게 된다. 이러한 연출 자체가 보수 기독교의 비판과 무관하지 않다. 정해나 작가는 의도적이지만 의도적이지 않은 그림자의 방식으로 이 작업을 종종걸음으로 이어나간다. 이러한 센스가 정해나의 만화를 빛나게 한다.   


2-3. 허상  

성소수자인 선우 엄마는 상징적인 교회의 ‘의무’에 매우 충실한 사람이다. 아들의 처지와 입장보다도 ‘교회’의 교리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쳐다볼지 걱정하는 인물이다. 그러니 선우의 입장에서는 엄마가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의 사랑을 실천한다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눈빛에 오히려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자신이 사랑했던 다윗을 잃고 당분간 교회에 나가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선우에게 “주일에는 웬만하면 밖에 나가지 말고, 네가 여기 있는데도 교회 안 나온 거 알면 교인들이 뭐라고 하겠니”(2:270)라고 말하는 엄마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선우는 엄마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 목사 집안이라는 점을 내세워 자신의 처지만을 돌보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된다. 정해나는 이러한 순간을 주목하기 위해 칸을 허무는 연출을 사용한다. 하얀 백지 배경에 투명한 칸 하나만을 이용해 “엄마는 나를 숨기기로 결심”(2:270)했다는 말을 적음으로써 무게감 있는 시적 장면을 연출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결심은 목사인 선우의 아버지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사실이라는 점에서 보수 기독교의 비판은 보다 강력해진다. 그러니 이 장면은 선우에게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한 번에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가족 공동체는 친구를 잃은 지독한 슬픔에 휘청거리는 자신을 지켜주기보다는 거짓된 교회의 교리로 똘똘 뭉친 왜곡된 목사‘다움’이나 교회‘다움’과 같은 실체 없는 허상에 의해 흔들린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사랑’과는 무관하다. 정해나 작가는 이처럼 우회적인 방식으로 예리하게 비판한다. 


2-4. 지옥  

이 텍스트에서 독자들은 다윗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난 후, 지옥에 갈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주영이의 태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주영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다윗이 기독교를 부정하고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는 교회의 교리에 맞서 싸우는 인물이다. 그녀는 “만약 하느님이 다윗이를 지옥에 떨어뜨린다면 나는 하느님과 싸울”(1:212) 거라고 말하면서 교회의 교리에 문제 제기한다. 이 지점은 절실하게 신을 믿는 행위 자체와 ‘교회’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걱정은 현실이 된다. 선우만큼 독실한 신자였던 주영은 다윗을 잃어버린 아픔에 몸을 가누지 못한다. 주영 역시 예수의 사랑에 흔들림 없는 믿음을 고수하지만, 이 계절에 없는 존재가 된 다윗으로 인해 신을 원망한다는 점에서 선우와 구별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교인들의 ‘대화’에서도 회의적이다. 가령, 주영은 자신이 다윗을 좋아하는 마음처럼 교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교인들끼리의 사랑한다”(2:142)는 말은 거짓이 된다. 이 인물 또한 기독교라는 강력한 상징에 맞선다. 


2-5. 자살 

정해나 작가는 보수적인 기독교를 ‘부정의 형식’으로 문제 삼는다. 선우의 아버지는 목사이기 때문에 미션스쿨에 다니는 선우의 학교에서 설교할 수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차분하면서도 지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같은 반 친구인 의영 역시 이런 선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선우가 자랑스러워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겉으로 보이기에 분명 온전한 인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인물이 설교 시간에 뱉은 말―“세상은 날이 갈수록 더 흔해지고 있습니다. 자살이나 마약, 동성애 같은 것들이 유행처럼 세상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이 죄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2:18-19))―은 전혀 동시대적이지 않다. 텍스트에 적힌 설교 내용을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다. 굉장히 보수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정해나 작가는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자명한 논리를 역설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역으로 문제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퀴어의 존재는 온전한 인물로 역전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랍스터〉(2015)의 주인공처럼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이 될 수밖에 없는 오묘한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공들여 다루는 주제는 성소수자를 ‘죄’로 규정하는 지점이다. 그러니 선우는 보수적인 사회뿐만 아니라 자신이 굳게 믿고 있는 신은 물론, 가족마저도 자신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선우는 그렇게 나약한 인물이 아니다.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해 자신의 태도와 성적지향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학교를 다니는 힘없는 청소년이 할 수 있는 가장 지독하고 힘겨운 저항이다. 뿐만 아니라, 선우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목소리’를 자살을 통해 분쇄시켜 자신이 품고 있는 성정체성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과정이 이 만화에서 가장 눈여겨볼 부분이다. 그래서 다음 장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외부가 아닌 ‘내부’   

이 만화가 대중들에게 명작이라고 호평받는 이유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인기 있는 학원물이라는 장르적 속성도 작용하지만, ‘선우’라는 인물이 하나의 개념에 포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동성애는 ‘죄’라는 보수 기독교의 세계관 속에서 선우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신을 향한 굳은 신념으로 증명하는 인물인 것이다. 다윗처럼 선우가 보수적인 기독교를 직접적으로 부정하거나, 보수적인 가정을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이 인물은 이런 손쉬운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가 있는 보수적인 기독교 내부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문제의 해결이 외부에 있지 않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선우는 가장 위독하고 험난한 ‘내부’ 자체인 보수적인 기독교 안에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우는 자신이 믿고 있는 신을 끝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부활절 날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다윗을 교통사고로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지켜본 신의 부름에 ‘주영’처럼 탓하지도 않는다. 갈등하고 원망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온전한 신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다. 나는 이 지점이 〈요나단의 목소리〉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보수기독교의 논리가 와르르 무너지고, 사랑이 아닌 진정한 사랑의 가치가 선우의 믿음으로 빛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우는 어떤 방식으로 이것을 증명하는 것일까. 

선우는 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숨겨 놓았던 모든 약을 입속에 털어 넣는다. 한마디로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지옥이든 천당이든 다윗을 따라가고 싶었고, 여러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끊은 것처럼, 선우 역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의미를 찾고자 했다. 자신을 지움으로써 의미를 획득하는 서글프고 애절한 방식이지만, 그 당시 그 인물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선우가 병원에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면회 온 의영에게 “무슨 사이였냐는”(3:220) 말을 내뱉는다. 이 목소리로 인해 독자는 물론, 이야기 속 주인공 중에 한 명인 의영 역시 견고한 벽과 마주하게 된다. 대체 선우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며 떨리는 목소리와 눈물로 회답한다. 

강직한 선우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목숨과 목소리를 헌납함으로써 신이 여전히 내 곁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기독교의 교리로 증명한다. 생각해 보라. 누군가가 당신에게 나에 대한 믿음을 시험해 보라고 할 때, 가장 확실한 것은 소중한 것을 내주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럴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이지 않겠는가. 100세 때 얻은 아들 이삭을 성경에서 아브라함에게 바치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요나단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선우는 다윗의 방식으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탁월하고 완벽한 ‘목소리’와 ‘생명’을 신에게 건넴으로써 그것을 증명한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내주어야만 얻을 수 있는 제로섬 게임이지만 희생을 담보로 이 작업을 이행해나간다. 그러니 누가 선우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그 누가 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선우보다 더 절박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선우는 온몸으로 그것을 증명한 인물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진실된 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여기서 진실된 마음은 위대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다. 성소수자도 다른 인간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진실이다. 정해나의 만화는 이처럼 성스러운 인물인 선우를 통해 보수기독교의 입장에 반기를 든다. 보수기독교 단체에서 성소수자들의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귀 기울이게 만든다. 이런 텍스트라면 정치적이든 작품성에 있어서든 다른 장르와 견주어서도 밀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정해나 작가는 선우의 절박한 목소리로 우리 사회에 잘못된 것들이 이제는 수정되어야 할 때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자신의 진실된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고 육우당의 시 한 구절을 적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육우당은 그 누구보다 낮은 목소리로 “정말로 댁들이 옳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넉넉 잡아 백년 뒤에 봅시다. 누가 과연 천상에서 영광을 누리는지(13).”라고 말한다. 나 또한 육우당의 말에 내 모든 패를 걸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인간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이 감정이 우리를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니 동시대의 여러 성소수자와 관련된 텍스트를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읽어주길 바란다. 만화는 독자들이 가장 쉽고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다. 만화의 역할은 그 누구보다도 빨리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장르다. 그 입구에 정해나의 『요나단의 목소리』가 서있다. 



(1) 이 글의 제목은 무제(無題)이다. 대신 성소자들에게 혐오 발언을 한 댓글을 적어두기로 한다. 당당한 이들의 언어가 언젠가는 부끄러움으로 바뀌기를 소망한다. 

(2) 기독교 인터넷 신문 ‘뉴스앤조이(www.newsnjoy.or.kr)’에서 ‘퀴어축제해방잔혹사’는 2023년 6월 26일부터 2023년 6월 30일까지 12화까지 기획되었다. 

(3) 정해나, 『요나단의 목소리(1-3)』, 다산북스, 2022. 정해나 작품의 경우 이 각주 이후 개별적으로 표시하지 않고 해당 권수와 페이지만을 적는다. 즉, 1권 31쪽의 경우 ‘“인용구절”(1:31)’이다.  

(4) 육우당, 「개정판 발간사」, 『내 혼은 꽃비 되어』(개정판), 행동하는성수자인권연대, 2023, 3쪽.  

(5) 영화 〈모어〉 21분 59초. 

(6) 육우당, 위의 책, 57쪽.  

(7) 영화 〈모어〉 46분 6초. 

(8) 마태복은 22장 37절에서 39절.

(9) 박경미, 「성소수자와 성서해석」,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 한티재, 2022, 183~209쪽. 

(10) 위의 책, 99쪽. 

(11) 앨리슨 벡델, 『펀 홈: 가족 희비극』(첫판 페이퍼백), 도서출판 움직씨, 2021, 69쪽.  

(12) 마이아 코베이브, 『젠더퀴어』, 이현 옮김, 학이시습, 2023, 82쪽. 

(13) 육우당, 앞의 시집, 32쪽. 



< 2023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

* 대상: 불행의 가능성에 대한 노트 - 「집이 없어」론, "작품: 집이 없어" 

* 최우수상: 학원 액션물에 대한 또다른 시선 ONE, "작품: ONE"  

* 우수상: 작품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적 약자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 "작품: 닭은 이외로 위대하다"  

* 우수상: 무제(無題), "작품: 요나단의 목소리"

* 신인상: 조각난 인간을 향한 응시와 그 개인화 ― 연상호의 만화 『계시록』 읽기, "작품: 계시록" 

* 신인상: <웹툰 약한영웅 평론> 경계 너머의 소년들, "작품: 약한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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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

글쓴이 문종필은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 이 평론집으로 2023년 5회 [죽비 문화 多 평론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밖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집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2021)과 「좋은 곳」(2022)과 「무제」(2023)을 발표하면서 만화평론을 시작했습니다.